나그네

[스크랩] 아버지가 미울때 보는 영화-`굿`바이의 매력

klgallery 2008. 12. 8. 11:33

 

S#1-삶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한 영화

 

모처럼 만에 따뜻한 영화 한편을 봤습니다. 납관사를 다룬 영화라고 해서 어떤 느낌일까 궁금했는데, 영화를 보면서 이렇게 몰입이 되어보긴 처음입니다. 영화가 2시간이 넘는 꽤 긴 시간 지속됨에도 불구하고 언제시간이 갔나 싶을 정도입니다.

 

이 영화는 간단하게 첼리스트에서 납관사가 된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음악에 대한 꿈, 회환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온 남자가 우연하게 '여행가이드'란 일자리를 구하려고 들어간 회사가, 장례와 납관을 진행하는 회사였지요. 처음엔 아내에게 말도 하지 않고 버텼습니다.

 

후에 정체가 드러나면서 고향 친구에게도 따돌림도 당합니다. 하지만 이런 스타일의 영화가 그렇듯, 타자의 죽음이란 일종의 아교처럼, 그의 상처와 관계맺음의 삐그덕 거림, 아내와의 갈등, 모든 것을 치유하면서, 푸른 균열의 틈새를 매웁니다.

 

사실 블로그를 접을까 생각했던 지난 2주 동안, 지쳐있던 제 마음을 한번에 다잡아준 영화였습니다. 살아간다는 것이 이미 배운 것을 재확인하고, 몸속에 각인시켜 가는 과정이라지만, 죽은 이를 보내는, 예법의 홀림에, 일종의 황홀함에 눈이 부셔보긴 처음이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집에 있던 요요마와 로스트로포비치의 음반으로 첼로란 악기의 매력에 일찍 눈을 떴습니다. 피아노를 배웠지만, 현은 항상 마음속의 로망이었죠. 아버지의 서재 위에 놓여진, 오래된 바이올린을 보면, 왜 아버지는 내가 원했던 현 대신, 건반을 가르쳤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내가 현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아버지의 뒷 모습이 어둡다는 걸 알았습니다. 때로는 진로 문제로, 사랑과 결혼 문제로 언성이 커질때도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싫을때마다, 사실 그 모습속에서 유전적으로 흐르는 내 자신의 또 다른 면모를 보기도 합니다. 사회적 존재로서의 아버지는 그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영화 속 주인공 다이고 또한 그렇습니다. 애인이 생겼다며 엄마를 떠난 존재, 어린시절 자신에게 첼로를 가르치던 엄격한 아버지만 있을 뿐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증오는 쓴 뿌리가 되어 여전히 그의 삶을 지배합니다.

 

 

이 영화의 매력은 무엇보다도 배경과 어울리는 음악, 정중동의 배경 속에

정밀하게 이루어지는 납관 의식입니다. 사랑하는 이를 다른 세상으로 보내야 하는

지상의 남은자를 위해, 시신을 씻고, 화장도 하고 웃는 표정을 만들어 보냅니다. 지상의 어느 한순간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해있음을 발견할 때, 영화 속 납관예식은 아픈

영혼을 위한 제의처럼 다가옵니다.

 

 

처음에는 머뭇거리다가, 납관사인 이쿠에이의 손길에 홀릭된 것일까요

주인공은 꿋꿋하게 그 길을 가기로 합니다. 물론 아내의 반대는 계속되고, 아내는 집을 나가고 말지요.

이쿠에이는 이미 아내와 사별했고, 그의 이야기를 통해, 왜 그가 납관사가 되었는지를

알게 됩니다. 죽음이란 코드는 동 서양의 공통부분이 많습니다.

 

49제가 그렇고, 죽은자를 보내는 이들의 복식이 그렇지요.

천국과 지상 사이에, 잠시 머무는 공간이 있음을 상정한 것도 닮았습니다.

그만큼 지상에서의 일들을 하루아침에 정리하고 호흡을 가다듬기란 쉽지 않나 봅니다.

 

 

이 영화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벌어지는 소소한 일상에서

죽음을 통한 살아있는 자들의 화해를 '따스한' 목소리와 첼로의 현을 통해 말해줍니다.

마냥 딱딱하지 않습니다. 율격미가 넘쳐나는 염습과정은 망자에 대한

지상에서의 마지막 배려와 베풂임을 알려주지요.

 

 

문제의 씬입니다. 이 영화를 보고 나오던 날, 이 장면에서

그들이 먹던 닭고기가 어찌나 맛있게 보이던지, 생맥주와 닭 한마리를

혼자서 다 먹어버렸습니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편지란 걸 쓰고 싶은 자신을 발견합니다.

물론 영화처럼 돌 자체로 편지를 대신할 수도 있겠지요. 오랜 세월 막막하고

답답한 마음이 돌처럼 견고하게 굳어져, 더 이상 화해의 꿈은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지금

시간의 격자무늬 속에 결곡한 여인의 피부처럼 표면이 발색되고

닦여진 돌을 만져보고 싶습니다. 그 속에서 왠지 내게 말하고자 했던

마음의 체온이 느껴질것 같습니다.

 

 

영화 속 장면 중에 연어들이 철을 맞아 회귀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것이 '운명'이라고 말하며 길을 지나가는 행인, 비록 첼리스트의 삶은 버렸지만

망자를 아름답게 보내는 일을 시작한 주인공을 향한, 세상의 귀소였습니다.

 

수의를 볼때마다, 많은 생각에 젖습니다. 예전 사람들은

자신의 수의를 직접 짜곤 했습니다. 햇살과 바람이 맑고 고운날, 자신이 짠 수의를 꺼내

거풍을 시켜, 예의 파삭함을 소재에 머금도록 도왔다지요.

 

세상의 어느 옷보다 단순한 옷, 일체의 장식이 배제된 채

주머니 조차 달려 있지 않은 수의 앞에서 배워야 할 것은 다름 아닌 '내려놓음'과

실존의 조건인 '독대'입니다. 우리를 지은 신이 존재한다면, 그/그녀는

이 죽음의 강을 건너, 절대자 앞에 홀로 서서, 살아온 삶의 방식과 그 정결성을

논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죽어도 용서하지 못했던, 할 생각 조차 하지 않았던

아버지를 염하며, 죽음 앞에서 용서하지 못할 것이 없음을, 세상의 모든 견고한

증오는 대기속에 아련하게 용해되고 마는 것임을 배웁니다. 어촌 마을에서 쓸쓸한 죽음을 지켜야 했던

주인공의 아버지, 그 모습에서, 한동안 삶의 의사결정 앞에 의절까지 감행해야 했던 제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중반 이후부터 계속 울었습니다.

자신에게 물어봅니다. 당신의 소중한 사람들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

우리는 삶과 생존의 문제를 이야기 하면서, 정작 죽음을 맞아들이고 대면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가슴아픈 망자와의 배웅의 시간,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의 풍경을 그리는 영화. 올 늦가을 제 마음을 잡아버린

한편의 영화를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죽은 자를 배웅하는 새벽아침, 지상에서의 마지막

짐을 내려놓고 가는 자들의 발걸음은 가벼워야 할 것입니다.

빛의 아이들로 태어나, 마지막 백색 수의를 입고, 다시 저 하늘의 아이로

태어가기 위해, 지상의 무대를 떠나는 자들을 위해, 한땀한땀, 수의를 짜고 싶습니다.

영화의 제목이 굿과 바이 사이에 휴지를 둔 것은, 채록될 삶의 형식과

아름다운 이별 사이에 존재하는 마음의 여백을 표현하는 것이겠죠? 그 여백을 어떻게 채워갈지는

우리 모두의 문제가 되겠지요. 더 늦기전에 사랑한다고 말해주세요.

그 대상이 누구건...... 늦기전에요.

 

 

playstop

 

 

                                          
출처 : 김홍기의 문화의 제국
글쓴이 : 김홍기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