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1-배우 고아성에 관한 단상
요즘 종종 보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17살 고등학교 1학년입니다. 처음 영화에서 보고 마음에 들었던 배우랍니다. 영화 <괴물>에서 납치된 딸로 나왔던 고아성양입니다. 최근 텔레비전에 나와 기타솜씨를 뽐냈다는데, 아쉽게 그 모습은 보질 못했네요. 제가 이 배우를 좋아하는 건, 인터넷에서 떠도는 4차원의 정신세계도 아니고, 17살 이팔청춘
의 파릇파릇한 외모 때문도 아닙니다. 우연히 고아성 양이 나온 영화 이야기를 쓸 생각에 배우 프로필을 찾다가 들어간 고아성양의 싸이홈피에 찍혀 있는 사진을 봤습니다. 열심히 사물을 찍는 모습이 보이고, 고등학교 여고생의 느낌이 물씬 배어나는 단문들이 눈에 띕니다. "오래전 읽던 책들은 모두다 남의 이야기, 차라리 누워서 내 안에 말을 찾는다"란 단문을 읽었습니다. 배우다운 감성이 묻어나지요. 열심히 공부에만 전념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라디오 방송을 시작하면서 5개월동안 열심히 책을 읽고 있습니다. 멋진 말을 발견하면 그 말이 살아움직이기 전에 연두색 펜으로 밑줄을 그어 마음밭에 담습니다. 그러나 결국 이 또한 다른 이의 말과 인생일 뿐이지요. 배우는 내 안의 목소리를 잘 듣는 존재여야 합니다. 그 감정의 기억들이 배우에겐 굉장히 큰 자양분이니까요.
물론 학교생활 하면서 배우생활도 겸하고, 그 덕분에 특례입학도 하기 쉬운 요즘이지만, 글의 수준을 봐서는 연기를 전공하기 보단, 차라리 다른 학문을 공부하면서 지평을 더 넓혀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최근 세계적인 첼리스트 장한나양의 인터뷰를 읽었는데요.
하버드에서 철학을 공부하다가 휴학중이라고 하더군요. 처음엔 사회학을 하려다, 철학을 해도 세상을 읽고 해석하는 힘을 키울 수 있겠다는 생각에 그런 선택을 했다더군요. 음악을 하는 친구들이 주변에 많습니다만, 결국 상위로 가면 갈수록, 테크닉도 중요하지만 곡의 해석, 시대에 대한 철저한 고증, 이에 바탕한 음의 두께를 측량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연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연기 공부를 했지만, 신체훈련은 기본으로 한다손 치더라도, 정말 필요한 것은 배역을 소화하기 위해, 가져야 할 다양한 경험의 측면들이죠. 문근영을 좋아했던 이유도, 그가 국문학을 선택해서 폭넓은 텍스트를 읽고, 그와 더불어 성장하고 싶다고 말했던 그 모습에 반해서였습니다. 이런 배우들을 보면 기분이 좋습니다.
홈피를 자세히 보니 꽤 일기도 열심히 쓰고 정리하는 모습이 보이더군요. 꼭 이런 좋은 습관은 비단 여고생 시절에만 머물러선 안됩니다.
배우는 항상 자신의 성장을 기록할 수 있어야 하고, 그 기록을 언제든 들추어보며 지금의 모습을 측량할 수 있어야 하니까요. "나는 여전히 진행중이고 불확실한 나를 안아주는 또 다른 내가 있다"란 말을 읽어봅니다. 홈피에 사진과 함께 올렸던데, 우선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에 끌리고, 배우로서 자신을 믿는 것 같아서 좋더군요.
17살의 그녀가 부럽습니다. 자신의 홈피에 써놓은 글처럼, "사람을 만나고 또 헤어지고 아파하고 학교에 다니고, 여행을 다니며 책도 읽고 모르는 거리를 한없이 거닐며 방황하고 우울해하고 굳어지고 즐거워하고 또 다시 두려워하고 불안해하며 음악을 듣고 사진을 찍고 하늘에 감동하며 새벽을 사랑하고 기타를 연주하고 시행착오를 겪고 추억을 회상하며 그리워하고......"
아성양이 좋은 배우로 성장하길 바랍니다. 일기장에 빼곡이 적어놓은 그 글의 무게를, 언어의 나래를 고이접어 마음 속에 잘 간직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17살의 배우에게서, 37살 아저씨는 지금까지 살아온 그 생이 갑자기 고맙습니다.
나 또한 17살의 소녀가 보고 놀랐던 프라하에 있어보았고, 모르는 거리에서 약간의 공황장애도 겪고, 아팠고, 헤어졌고, 우울해했던 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사실 종종 그럽니다. 일이 잘 안풀리거나 사람들의 괜한 구설수나 오해를 살때가 있고, 어른이 될수록 상처를 더 잘받게 된다는 걸 배운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에 감동하고 정지된 시간 속에 굳어진 아름다운 기억을 사진으로 기록할 수 있는 내가 있고, 피아노를 치고, 굳은 몸을 긴장시키기 위해, 쉬지 않고 스트레칭과 발레기본 동작을 연습합니다. 어른이 되어도 사업하면서, 사람을 부리며, 혹은 다루며, 팀을 구성하고, 누군가에게 허락을 받는 일에 익숙하지 않아 시행착오를 또 겪으면서도, 나 또한 아성양만큼 "불확실한 나를 안아주는 또 다른 나를 사랑한답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도종환의 <흔들리며 피는 꽃>
좋은 배우로 성장해 주길 바랍니다. 세월이 흘렀을 때도 기억이 되는 배우가 되면 더 좋겠습니다.
저도 아성양이 좋아하는 네스티요나를 좋아한답니다. 네스티요나의 <폭설>을 한번 골라볼까요.
오늘 세상이 온통 은세상인 곳이 많은 가 봅니다. 겨울숲에 내리는 눈이 숲의 연두를
지우지 않듯, 함께 걷고 함께 숨쉬고 먹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립습니다.
요즘은 그리운 사람도 많고, 만나고 싶은 사람도 많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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