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

[스크랩] 담쟁이덩굴 추위에 붉다

klgallery 2008. 12. 2. 11:55

 

오늘은 교지 교정보느라 인쇄소를 두 번 출입하면서 샛길을 골라 가는데

담벼락 밑에 유난히 빨간 담쟁이덩굴 단풍이 보이길래 차를 곁에 세우고

조용히 앵글을 맞췄다. 밤이면 꽤 기온이 내려갔을 중산간 마을, 찬바람도

두려하지 않고 차거운 돌을 끌어안은 채 마지막 생명의 불꽃을 태우고 있었다.


  

 

♣ 담쟁이덩굴은 무엇을 향하는가 - 나호열

    

혼자 서지 못함을 알았을 때

그것은 치욕이었다

망원경으로 멀리

희망의 절벽을 내려가기엔

나의 몸은 너무 가늘고

지쳐 있었다

건너가야 할 하루는

건널 수 없는 강보다 더 넓었고

살아야 한다

손에 잡히는 것 아무 것이나 잡았다

그래,

지금 이 높다란 붉은 담장 기어오르는 그것이

나의 전부가 아냐

흡혈귀처럼 붙어있는 이것이

나의 사랑은 아냐

살아온 나날들이

식은 땀 잎사귀로 매달려 있지만

저 담장을 넘어가야 한다

당당하게 내 힘으로 서게 될 때까지

사막까지라도 가야만 한다

 

 

♣ 붉은 담쟁이 - 현상길

    

하늘을 내려

마른 세월은

위태롭게 매달려 있다

상강 무렵

그리움 한 개비 꺼내

벽에다 긋는다

추억이 타는 냄새

그 질긴 불씨를 당긴다

번져 오르는 가을

바깥에서 시작하여

안으로

내 안으로

타 들어가는 노을

사랑인가

사랑인가

 

 

♣ 담쟁이 - 차수경


저 붉은

순례의 행렬

속죄의례인가

무릎으로 기어

굳어진 마디마디

고행의 흔적

열사의 벌판에

혈관처럼 뻗은

기도의 줄기

간간히 들리는

낙타의 맑은 울음

바람이 몰아온

꿈의 정수리에

빛나는 햇살

아득히

성지(聖地)가 보인다


 

♣ 저 담벼락 붉은 담쟁이덩굴 - 이정자  


저 담벼락 붉은 담쟁이덩굴이

담을 넘는다, 벽을 허문다


붉게 물들인다는 건

심장이 뛴다는 거다, 두근거림이다

살아있음의 증거다


꿈쩍도 않던 벽을, 경계를

붉게 물들이며 누군가를 허물어 본 적 있는가

사랑의 감전, 그 뜨거운 피의 전류를

느껴 본 적이 있는가

 

 

♣ 담쟁이가 있는 가을 풍경 - (宵火)고은영


화장 발 죽여주는

네 간드러진 붉은 입술

부스스 바람 스칠 때

더욱 깊어지는 서글픈 몸짓


기다리는 메아리는

돌아올 생각이 없고

살아 있는 천국을 소망하는

진홍빛 갈증은 눈물이 난다


햇살 가득

출렁이는 빛과

정직한 욕망의 슬픈 눈과

현실적 자아가 실종된

허기져 무심한 오나니


하기사 이 창백한 세상

분분한 네 사랑을

흩뿌린다 할지라도

줄창 싸늘한 사람들의

눈빛에서 길어 내는

곁가지 사랑 같기야 할까


쓸쓸하게 달아나는

밋밋한 시간 속에

충족되지 않은 필요와 처량한 진실

그 이면에 놓여 붉게 물든

너의 그림자는 유독 푸르다

 

 

♬ Schumann - Traumerei - cello 연주

출처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글쓴이 : 김창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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