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자유로 - 황인숙
나는 아무의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구절초처럼 빛나는 혈통에 대한
간도 쓸개도 없이
멍하니 기가 죽어 살고 있다.
나는 타락했다.
내가 아무의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피의 계율을 잊었기 때문에.
나는 아무의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구절초처럼 빛나는 혈통에 대한
간도 쓸개도 없이
멍하니 기가 죽어 살고 있다.
나는 타락했다.
내가 아무의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피의 계율을 잊었기 때문에.
* 슬픔이 나를 깨운다 - 황인숙
슬픔이 나를 깨운다.
벌써!
매일 새벽 나를 깨우러 오는 슬픔은
그 시간이 점점 빨라진다.
슬픔은 분명 과로하고 있다.
소리없이 나를 흔들고, 깨어나는 나를 지켜보는 슬픔은
공손히 읍하고 온종일 나를 떠나지 않는다.
슬픔은 잠시 나를 그대로 누워있게 하고
어제와 그제, 그끄제, 그 전날의 일들을 노래해준다.
슬픔의 나직하고 쉰 목소리에 나는 울음을 터뜨린다.
슬픔은 가볍게 한숨지며 노래를 그친다.
그리고, 오늘은 무엇을 할 것인지 묻는다.
모르겠어…… 나는 중얼거린다.
슬픔은 나를 일으키고
창문을 열고 담요를 정리한다.
슬픔은 책을 펼쳐주고, 전화를 받아주고, 세숫물을 데워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식사를 하시지 않겠냐고 권한다.
나는 슬픔이 해주는 밥을 먹고 싶지 않다.
내가 외출을 할 때도 따라나서는 슬픔이
어느 결엔가 눈에 띄지 않기도 하지만
내 방을 향하여 한 발 한 발 돌아갈 때
나는 그곳에서 슬픔이
방안 가득히 웅크리고 곱다랗게 기다리고 있음을 안다.
* 진눈깨비 2 - 황인숙
- 죽은 벗에게
네 이름 이제는
나를 울고 싶게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가끔 네 이름을 부른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어서
삶이 나를 삐치게 할 때.
네가 안 쓴 달력들이
파지처럼 쌓였던 나날,
이라고 하면 네게 위안이 될까?
오오, 미안, 화내지 말라!
나도, 미친 듯, 살고 싶다!
....그러면 추위가 벗어질까?
* 가을날 새벽 - 황인숙
가을날 새벽
말간 유리창에 맺힌
물방울 같은 별들
쭉 훑어낸
손가락 시리다
가을날 새벽
서른댓 개의 증증계
뚜벅뚜벅 짚어
깡총깡총 뛰어
내 몸 속에
층층계
발끝 시리다
참은 숨 물밀리듯
얼굴 시리다
가을날 새벽
흠뻑 울음 운
젖은 눈들의 숲
새들이 길을 흔든다.
* 고아원 - 황인숙
그들은
축축하고 추운 긴 복도다.
파리한 물고기 같은 달을 향해
기울어져 있다.
한구석에 새끼 고양이 한 마리가 묶여 있다.
발을 멈추고 쓰다듬자
요요처럼 내 손에 탁탁 붙는 새끼 고양이여.
그들은 멀거니 본다.
새끼 고양이 혹은 내 손길을.
항상 비껴선 복도여.
도무지 손길에 익숙지 못한 존재여.
아무 손길 닿지 않는 새끼 고양이들의 복도여.
* 생활! - 황인숙
결혼한 친구가 보낸 편지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일해서 벌어먹고 사는 일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데
수삼년이 걸렸다... 나는 일을 해야만 한다.
그것이 처음엔 미칠 듯 외로운 일이었다."
자기 먹이를 자기가 구해야만 한다는 것.
이 각성은, 정말이지 외로운 것이다.
(결혼을 한 여자에게는 더욱이나.)
내 누누이 하는 말이지만
가난하다는 건 고독한 것이다.
인생이란! 고단하지 않으면
구차한 것.
* 문밖에서 - 황인숙
방을 구하지 못한 혹은
깃들일 마음을 구하지 못한
가령 사랑들이
서리가 되어 깨어난다.
골목골목에 대로의 한적한 곳에
우두커니 나무 밑에 달빛 아래
서리들이 웅숭거린다.
창밖에. 모든 문밖에.
* 삶의 시간을 길게 하는 슬픔 - 황인숙
나이는 서른 다섯 살.
가을도 저물어 시린 바람이 안팎으로 몰아친다.
이제는 더 이상 청춘도 없다. 사랑도.
밤은 막막, 낮은 휑휑.
그렇지만,
죽음보다는 따뜻하다.
앙다문 이빨.
눈꺼풀 저 구석에 지그시 눌러둔
쓰라린 눈알.
억울해? 억울하지.
억울함을 딛고 비참을 딛고
생이 몰아치는 공포를 딛고
딛고, 딛고!
오, 추락하는 꿈으로도
오, 따분한 꿈으로도
오, 처량한 꿈으로도
비비틀리는, 푸드덕거리는
몸은 작열한다!
죽은 몸에는
눈먼 꿈도 깃들이지 않는다네.
당신을 저버린 연인이 무섭게 차갑다고?
죽음보다는 따뜻하다.
* 세상의 모든 아침 - 황인숙
세상의 모든 눈송이들이
지금 춤추듯 내리고 있다
어딘가 세상의
모든 눈 내리는 곳에
그래, 나의 애인은
사랑을 다짐하고 있다
누군가 세상의
그가 사랑하는 여자에게
세상의 모든 눈송이들이
바람을 수놓는다
세상의
모든 눈보라치는 곳에
나의 애인의 사랑은
그침이 없지
세상의 모든
그가 사랑하는 여자들!
아, 세상의 모든 눈을 다 맞을 수는 없다
세상의 모든 시간을 다 살 수는 없다
지금 어디선가...
* 사랑의 구개 - 황인숙
기억 없이도 그리움은 찾아오고
기억 없이도 목이 마르다.
풀들은 흙 묻은 얼굴을 털고
뭐라고 뭐라고 나무들은
햇볕 속에 잎을 토해내는데,
다시 봄이란다.
(그대여, 그토록 멀리 있으니
그 거리만큼의 바람으로
뺨을 식히며 토로하노라)
참 오랜만에 볼펜을 쥐고 눈을 감았다.
그만해도 피가 따뜻했다, 처음엔.
나의 척추, 나의 묵주, 나의,
나는 그 뾰족한 끝으로
차라리 심장을 후벼파고
뻗어버리고 싶었다,
햇볕 속에.
아, 다시 봄이라는데
갈라진 마음은 언청이라서
휘파람을 불 수 없다.
* 봄날 - 황인숙
`전화 받지 말 것'
이라고 쓴 딱지를 전화기에 붙여놓고
나는 부재중이었다.
나, 세상으로부터 멀리
떠나갔다 돌아왔을 때
오랜 잠에도 식지 않고 베개의 부드러움에 묻힌
턱뼈로만 존재했다.
어떤 소리도 분간되지 않고
그저 소리로만 공기를 끄적이고
눈을 떴는지 감았는지
마음은 풀리고 적막했다
적막하게 평화로웠다
나, 아득히 세상과 멀리.
닝닝닝 전화벨 울렸다.
닝닝닝 전화벨 끊이지 않고
닝닝닝 다 됐니?
넘실거렸다.
나는 꽉 눈을 감았다.
닝닝닝 꽃이 피고 닝닝닝 바람 불고
닝닝닝 닝닝닝 누군가
내 다섯 모가지를 친친 감았다.
아주 달아날 수 있을 것 같았다.
* 칼로 사과를 먹다 - 황인숙
사과 껍질의 붉은 끈이
구불구불 길어진다.
사과즙이 손끝에서
손목으로 흘러내린다.
향긋한 사과 내음이 기어든다.
나는 깎은 사과를 접시 위에서 조각낸 다음
무심히 칼끝으로
한 조각 찍어올려 입에 넣는다.
"그러지 마. 칼로 음식을 먹으면
가슴 아픈 일을 당한대."
언니는 말했었다.
세상에는
칼로 무엇을 먹이는 사람 또한 있겠지.
(그 또한 가슴이 아프겠지)
칼로 사과를 먹으면서
언니의 말이 떠오르고
내가 칼로 무엇을 먹인 사람들이 떠오르고
아아, 그때 나,
왜 그랬을까......
나는 계속
칼로 사과를 찍어 먹는다.
(젊다는 건,
아직 가슴 아플
많은 일이 남아 있다는 건데.
그걸 아직
두려워한다는 건데.)
* 안개비 속에서 - 황인숙
나무들은 자기 심장의 박동대로
새를 날린다.
급히 지나쳤으면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으리라.
붉은 신호등 앞에서
겨우내 먼지에 싸여
그 옆의 제설용 모래 상자와 다름없어 보이던
쥐똥나무덤불이 여릿여릿 숨쉬는 것을.
아직도 제설용 모래 상자와
별 다름은 없어 보이지만.
보이는 대로 보지 말아야지.
그녀가 어떻게 보이고 싶었을까?
바로, 봄.
왠지 그러리라고.
붉은 신호등 앞에서 발을 멈추고.
그녀의 잠든 얼굴 위에
오는지 마는지 한 빗소리에 귀기울이며
이제사 네 머리칼도
젖어들고 있다.
* 비 - 황인숙
저렇게 종종 걸음으로
나도 누군가를 찾아나서고 싶다.
*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 황인숙
이 다음에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윤기 잘잘 흐르는 까망 얼룩고양이로
태어나리라.
사뿐사뿐 뛸 때면 커다란 까치 같고
공처럼 둥글릴 줄도 아는
작은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나는 뒷마루에서 졸지 않으리라
가시덤불 속을 누벼 누벼
너른 들판으로 나가리라
거기서 들쥐와 뛰어놀리라
배가 고프면 살금살금
참새떼를 덮치리라
그들은 놀라 후다닥 달아나겠지
아 하 하 하
폴짝폴짝 뒤따르리라
푸드득 푸드드득
꼬마 참새는 잡지 않으리라
할딱거리는 고놈을 앞발로 툭 건드려
놀래주기만 하리라
그리고 곧장 내달아
제일 큰 참새를 잡으리라.
이윽고 해는 기울어
바람은 스산해지겠지
들쥐도 참새도 가버리고
어둔 벌판에 홀로 남겠지
나는 돌아가지 않으리라
어둠을 핥으며 낟가리를 찾으리라
그 속은 아늑하고 짚단 냄새 훈훈하겠지
훌쩍 뛰어올라 깊이 웅크리리라
내 잠자리는 달빛을 받아
은근히 빛나겠지
혹은 거센 바람과 함께 찬 비가
빈 벌판을 쏘다닐지도 모르지
그래도 난 털끝 하나 적시지 않을걸.
나는 꿈을 꾸리라
놓친 참새를 쫓아
밝은 들판을 내닫는 꿈을.
* 쓰디쓴 자유 - 황인숙
신이 내리시는 선물은
한난들 달가와할 것 없노니.
바다거북처럼 흘린 안달 끝에
나는 뭍으로부터 풀려났다.
그립고 그리운 바다여.
나는 엉금엉금 그에게
될 수 있는 한, 빨리 달려갔다.
그의 혀가 내 머릴 핥는 순간의 애틋함이여.
나는 풍덩 몸을 던졌다.
나는 유유히 몸을 놀렸다.
나는 자유로왔다.
나는 자유로이 숨통을 물로 채우며
자유로이 가라앉았다.
나는 한없이 자유로왔다.
뭍이여!
나를 반환하겠다.
데려가다오.
꽁꽁 묶어다오.
* 진눈깨비 - 황인숙
1.
유리창 저쪽
맑게 개인 저편
감기지 않는 눈
우리 다시 만날 때
너는 나를 기억할까?
내가 너를 기억할까?
3월,
벗을 수 없는 추위.
2.
네 이름 이제는
나를 울고 싶게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가끔 네 이름을 부른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어서
삶이 나를 삐치게 할 때.
네가 안 쓴 달력들이
파지처럼 쌓였던 나날,
이라고 하면 네게 위안이 될까?
오오, 미안, 화내지 말라!
나도, 미친 듯, 살고 싶다!
......그러면 추위가 벗어질까?
* 나를 믿지 마세요 - 황인숙
믿지 마세요.
당신이 믿음을 저버리고, 들킨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는 사람을.
절대로
마음을 놓지 마세요.
하느님도 그를 달래 실 수 없어요.
까실한 얼굴을
절벅거리며 씻다가
(우리에게는 바빌론강도 없으니까)
수돗물을 틀어놓고
수돗물가에 앉아서 울어본 적이 있는 사람은
내 말을 알 거예요.
* 나뭇잎 하나에 - 황인숙
가장 너른 하늘을 보기 위하여
가장 너른 땅이 필요한 건 아니다.
비온 뒤의 즙 많은 햇살을
빠는 나뭇잎.
그 치켜올려진 입귀에
황혼이 몰려든다.
간지러움, 간지러움
(간지러움은 통증)
모든 이파리에 바람은 말을 전하니
나는 거기에
귀 기울여야지.
* 황인숙
1958년 서울생.
서울예술전문대 문예창작과 졸.
198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슬픔이 나를 깨운다> <우리는 철새처럼 만났다>
1958년 서울생.
서울예술전문대 문예창작과 졸.
198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슬픔이 나를 깨운다> <우리는 철새처럼 만났다>
하늘빛 그리움 / 해금 이유라, 피아노 이기경, 첼로
강승희
출처 : 방문해주신 모든분께 행복을 드려요!!~~
글쓴이 : 산바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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