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자꽃
열일곱 사람이 나흘 동안 걸으려 가는 길
100미리 메크로 렌즈를 장착한 커다란 카메라를
들었다 놓았다. 들었다 놓았다. 결국 놓고 갔다.
오르고 내리고, 배낭 가득한 무거운 짐
그리고 꽃에 매달려 있다가 뒤쳐졌을 때
받을 눈총들을 생각하며
걷고 보는 데 충실하기 위하여
성삼재에 도착, 차에서 내리자마자
쏟아지는 소나기를 피하러 우왕좌왕하다
옷을 더러 적시고 떠나는 길섶
물봉선, 꼬리풀, 노루오줌, 둥근이질풀 등이 지천이지만
그냥 눈에 담고 간다.
* 모싯대
노고단 산장에 배낭을 부려놓고 노고단에 오르는 길
흰여로, 말나리, 술패랭이, 모싯대, 산오이풀…
벌써 졌을 것이라고 믿었던 꽃들이 지천이다.
이곳쯤이면 시간도 많고 얼마든지 꽃을
찍을 수 있었을 것인데, 후회해도 소용없었다.
하여, 거기서 눈에 담아둔 꽃들을
재작년 덕유산에서 찍은 사진에서 골라
아쉬운 대로
몇 장 늘어놓아본다.
* 할미밀망
♧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 이원규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천왕봉 일출을 보러 오시라
삼대째 내리 적선한 사람만 볼 수 있으니
아무나 오지 마시고
노고단 구름바다에 빠지려면
원추리 꽃무리에 흑심을 품지 않는
이슬의 눈으로 오시라
행여 반야봉 저녁노을을 품으려면
여인의 둔부를 스치는 바람으로 오고
피아골의 단풍을 만나려면
먼저 온몸이 달아 오른 절정으로 오시라
굳이 지리산에 오려거든
불일폭포의 물방망이를 맞으러
벌 받는 아이처럼 등짝 시퍼렇게 오고
벽소령의 눈시린 달빛을 받으려면
뼈마저 부스러지는 회한으로 오시라
* 산오이풀
그래도 지리산에 오려거든
세석평전의 철쭉꽃 길을 따라
온몸 불 사르는 혁명의 이름으로 오고
최후의 처녀림 칠선계곡에는
아무 죄도 없는 나무꾼으로만 오시라
진실로 진실로 지리산에 오려거든
섬진강 푸른 산그림자 속으로
백사장의 모래알처럼 겸허하게 오고
연하봉의 벼랑과 고사목을 보려면
툭하면 자살을 꿈꾸는 이만 반성하러 오시라
그러나 굳이 지리산에 오고 싶다면
언제 어느 곳이든 아무렇게나 오시라
그대는 나날이 변덕스럽지만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마음이니
행여 견딜 만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
* 물봉선
♧ 지리산 - 정군수
아침 햇살을 받고 일어서는 지리산은
어제의 산이 아니다. 거대한 나뭇잎
그 잎줄기 타고 수맥이 가듯
산의 정기 천왕봉으로 흘러드는
투명한 핏줄을 보여준다
지치고 찢긴 낡은 의상들
훌훌 벗어 계곡 물에 씻어 버리고
우리의 모습으로 일어나는 산
비겁과 치욕의 기억들 너의 품안에서는
자정의 샘물로 다시 솟는다
푸른 머리를 떠도는 구름도
발 밑을 구르는 물살도
깊어 가는 사색을 거스르지 못할지니
* 어수리
한 사람의 산이 아니었음을
한 세대의 역사가 아니었음을
떠오르는 햇살 속 밝음과 그늘
그 신선하게 날이 선 등성이에
우리의 예지를 갈아세운다
깊은 산이 먼 곳에서 울림을 불러오듯
백두에서 한라에서 꿈을 부르며
용암 끓어오르는 너의 깊은 곳
언젠가 사해를 넘칠 지열을 감추고
떠오르는 아침
오늘의 정맥으로 다시 살아나는
투명한 핏줄을 보여준다
* 꼬리풀
♧ 지리산 - 권경업
오를수록
가슴 저린 산
서럽게 서럽게
눈물 나는 산
쫓기던 이 좇던 이
영문 없이 끌려간
핏덩이까지
아물어간 상혼에도
고통은 남아
유월 짙푸른
한을 삭이고
용서하고 용서받을
하나 됨을 바라
초로에 반백이 다 되도록
골마다 영마다
바람으로 흐느끼는
지리산은 서러운 산
* 바위채송화
♧ 지리산에서 1 - 이수정
여기였구나
구름 가던 곳
바람 가던 곳
분홍 꽃바람 불어오던 곳
초록 솔향기 번져오던 곳
어디론가
새들 날아가던 곳
어디선가
새들 날아오던 곳
금빛 꿈속에서 그려보던 곳
세상사 아스라이 내려다보는 곳
아하
여기였구나
* 말나리
♧ 지리산허형만 - 허형만
내가 뱀사골로 들어섰을 때
하늘말나리를 가슴에 꼭 품고 있는
지리산이 보였다
그 자리가 환했다
지리산하늘말나리는 그렇게 환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깊은 잠처럼 드러누운 계곡은
간밤의 소나기가 점령했는지 수런거리고
덩달아 수런거림을 듣고 있던 지리산이
지리산물푸레도 가슴에 품는 게 보였다
그 자리도 또한 환했다
내가 마침내 뱀사골을 빠져나올 때쯤
지리산은 지리산바위떡풀 지리산싸리
지리회나무 지리쐐기풀까지 시켜
등뒤에서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지리산허형만!
지리산허형만!
* 난장이바위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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