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은 무조의 용모가 빼어나다는 말을 듣고 궁으로 불러들였다고 하지만, 오늘날 추정해볼 수 있는 무조의 용모는 너른 이마에 네모진 턱, 튼튼한 골격, 강인한 이미지, 여기에 이지적인 분위기가 감도는 용모, 요컨대 시원시원한 여걸의 용모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성적인 매력을 각별하게 풍기는 용모는 아니었던 듯하다. 여기에 성격도 대담하고 터프한 호걸 스타일이어서 태종은 무조를 후궁으로 맞아들였으면서도 가까이 하지는 않았다. 무조가 태종의 아이를 갖지 못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태종이 세상을 떠나자 무조를 포함하여 아이를 갖지 못한 태종의 비빈들은 절에 보내졌다. 죽은 황제를 위한 공양을 드리며 남은 생을 보내야 하는 처지가 된 것. 무조는 태종의 총애를 받지는 못했지만, 그 아들인 황태자 이치(李治)와 각별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듯하다. 황제의 여인이 황태자와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것만 봐도, 무조의 대담함을 짐작할 수 있다. 고종으로 등극한 이치는 아버지 태종의 기일에 장안의 큰 절인 감업사로 갔다가 무조를 발견하고(이미 무조의 소재를 알고 감업사로 갔을 가능성도 있다.) 다시 정열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무조가 651년 고종의 후궁으로 다시 황궁에 발 들여 놓을 수 있었던 것은, 당시 고종의 황후가 소 숙비를 견제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황후는 무조와 함께 소 숙비에 대항하는 공동 전선을 펴면서 무조를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고자 했던 것. 무조는 황후를 공손히 받들면서 황궁 내부에 자신에게 우호적인 사람들을 많이 만들어 나갔다. 무조를 통해 소 숙비를 견제하려던 황후의 계획도 성공했다. 그러나 황후는 호랑이 새끼를 키운 꼴이었다. 무조는 특유의 친화력과 정치력으로 황궁 사람들의 인심을 모았다. 결국 무조는 빈 중 첫 번째 지위인 소의에 올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