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뉴스

측천무후

klgallery 2009. 2. 11. 15:21

당나라 고종 황제의 황후였지만 황태자들을 연이어 폐위시키고 자신이 황제가 된 여성. 스스로 주나라를 세워 15년 간 중국을 다스린 중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여황제. 그는 측천무후다. 잔인한 폭군? 권력의 화신? 일세를 풍미한 탁월한 정치가이자 여걸? 그 곡절 많은 삶만큼이나 여러 평가가 엇갈리는 측천무후를 만나보자.

 

당나라 고위 대신들이 황궁의 건원전으로 황급히 모여들었다. 모두들 ‘올 것이 왔구나’하는 심정이었다. 두 달 전 고종 황제가 세상을 떠날 때 유언을 받들었던 고명대신 배염(裴炎)은, 대신들과 함께 병사들을 몰고 왔다. 이윽고 배염이 황태후의 명령을 소리 높여 읽어내려 갔다. 요지는 간단했다. “황제를 폐하여 여릉왕(廬陵王)으로 임명한다!” 제위에 오른 지 두 달밖에 되지 않은 당나라 4대 황제 중종(中宗) 이현(李顯. 이철(李哲))은 정신이 아득해져 소리쳤다. “내가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684년 2월 26일 중종은 대신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제위에 오른 지 50여일 만에 이렇게 쫓겨나 방주(房州: 호남성 방현)로 유배되었다. 고종의 일곱 째 아들 이현이 이렇게 물러나고 여덟 째 아들 이륜(李輪. 이단(李旦))이 5대 황제가 되었다(예종(睿宗)). 이현의 나이 28살, 이륜의 나이 24살 때였다. 폐위의 명을 내린 황태후는 본명이 무조(武照)인 측천무후다. 당 제국이 측천무후의 세상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 준 이 사건의 전말은 무엇인가?

 

중종과 예종은 모두 측천무후의 아들로, 실권은 측천무후에게 있었다. 중종은 위(韋) 황후의 부친, 즉 장인 위현정(韋玄貞)을 시중으로 앉히려 했지만 배염 등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화가 난 중종이 말했다. “내가 천하를 위현정에게 준다 해도 안 될 것이 없을 텐데, 그까짓 시중을 시키는 것을 가지고 그러는가!” 배염은 중종의 이 말을 측천무후에게 고했다. 정권 교체기의 혼란을 막고 국정을 안정시켜야 할 새 황제가 국정에 혼란을 가져오는 조치를 취하려 한 셈이었다. 자칫하면 위씨 일족이 득세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내게 무슨 죄가 있느냐” 항변하는 중종을 측천무후가 꾸짖었다. “그대는 천하를 위현정에게 주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러고도 죄가 없다 말하는가?”

 

 

예종 즉위 뒤 측천무후가 국정의 전면에 본격적으로 나서면서 취한 첫 조치는, 본래 황태자였던 자신과 고종 사이의 차남 이현(李賢)을 죽인 일이다. 친위대 장군을 유배지로 보내 경비를 강화하라는 명을 내렸지만, 장군은 측천무후의 뜻을 알아채고 이현을 자살하게 했다. 황태자 시절 이현은 측천무후가 자신의 생모가 아니라는 소문에 시달렸고, 측천무후도 황태자를 마음에 내켜 하지 않았다. 결국 동궁에서 갑옷 수백 벌이 발견된 것을 반역의 증거로 삼아 공격했고, 고종은 측천무후의 뜻을 따라 이현을 쫓아냈었다. 그 이전 측천무후는 자신과 고종 사이의 장남 이홍(李弘. 고종의 다섯째 아들)을 황태자로 세웠었지만, 이홍은 측천무후의 전횡을 염려하여 황제에게 자주 직언했다. 이홍은 병약했지만 학문을 좋아하고 정이 많았다. 이홍은 측천무후와 경쟁했던 소 숙비가 낳은 배다른 공주 둘을 불쌍히 여겨(연금 상태에 있었다) 시집을 보내주었다. 그 직후 이홍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675년). 사람들은 측천무후가 독살시킨 거라 여겼고, 이 소문은 터무니없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낳은 아들이자 황태자였던 이홍과 이현(李賢)을 죽이고, 역시 아들인 중종 이현(李顯)을 폐위시키고 막내 이륜을 등극시킨 측천무후.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니었다. 예종도 690년 사실상 폐위시켜 황태자 지위로 강등시키고 측천무후 자신이 제위에 올랐다. 나라 이름을 대주(大周)로 바꾸고 수도도 장안에서 낙양(신도(神都)로 이름을 바꿈)으로 옮겼다. 측천무후가 세운 주나라를 공자 시대 주나라와 구별하여 무주(武周)라 일컫기도 한다. 


 

중국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 즉 유일한 여성 황제가 탄생한 것이다. 서양 여러 나라의 여왕은, 왕비가 남편 사후에 예정된 계승자가 어리거나 하는 등의 이유로 일정 기간 황제나 국왕 역할을 하는 경우나 적합한 남성 계승자가 없을 경우에 한정된다. 남성 황제의 일종의 대용인 셈이다. 측천무후는 당나라 고종의 황후였지만 고종의 미망인으로서 황제가 된 것이 아니며, 무씨 성을 지닌 여성으로서 스스로 왕조를 열고 제위에 올랐다. 이것은 남성만이 황제가 될 수 있다는 하나의 철칙 때문에, 당나라 황제가 될 수는 없다는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기도 했다.

 

 

측천무후, 즉 무조가 당 태종의 후궁으로 황실에 발을 들여 놓은 것은 14살 때(641 또는 642년)였다. 무조의 아버지 무사확은 목재업으로 재산을 모으고 수나라 양제 시대에 하급 무사가 되었다. 이후 이연(李淵. 당나라 고조)이 수나라에 반기를 들었을 때 그 부하가 되어 태종 시대에 공부상서를 지냈다. 무조의 어머니는 무사확의 첩으로, 수나라 황족 가문 출신이었다. 무사확은 격변기에 처세를 잘 한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명문가 출신 여인을 첩으로 맞아들여 집안의 격까지 높인 것이다. 무조는 출세를 향한 남다른 의지를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게 아니었을까.

 


태종은 무조의 용모가 빼어나다는 말을 듣고 궁으로 불러들였다고 하지만, 오늘날 추정해볼 수 있는 무조의 용모는 너른 이마에 네모진 턱, 튼튼한 골격, 강인한 이미지, 여기에 이지적인 분위기가 감도는 용모, 요컨대 시원시원한 여걸의 용모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성적인 매력을 각별하게 풍기는 용모는 아니었던 듯하다. 여기에 성격도 대담하고 터프한 호걸 스타일이어서 태종은 무조를 후궁으로 맞아들였으면서도 가까이 하지는 않았다. 무조가 태종의 아이를 갖지 못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태종이 세상을 떠나자 무조를 포함하여 아이를 갖지 못한 태종의 비빈들은 절에 보내졌다. 죽은 황제를 위한 공양을 드리며 남은 생을 보내야 하는 처지가 된 것. 무조는 태종의 총애를 받지는 못했지만, 그 아들인 황태자 이치(李治)와 각별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듯하다. 황제의 여인이 황태자와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것만 봐도, 무조의 대담함을 짐작할 수 있다. 고종으로 등극한 이치는 아버지 태종의 기일에 장안의 큰 절인 감업사로 갔다가 무조를 발견하고(이미 무조의 소재를 알고 감업사로 갔을 가능성도 있다.) 다시 정열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무조가 651년 고종의 후궁으로 다시 황궁에 발 들여 놓을 수 있었던 것은, 당시 고종의 황후가 소 숙비를 견제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황후는 무조와 함께 소 숙비에 대항하는 공동 전선을 펴면서 무조를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고자 했던 것. 무조는 황후를 공손히 받들면서 황궁 내부에 자신에게 우호적인 사람들을 많이 만들어 나갔다. 무조를 통해 소 숙비를 견제하려던 황후의 계획도 성공했다. 그러나 황후는 호랑이 새끼를 키운 꼴이었다. 무조는 특유의 친화력과 정치력으로 황궁 사람들의 인심을 모았다. 결국 무조는 빈 중 첫 번째 지위인 소의에 올랐다.

 

 

무조, 아니 측천무후가 자신의 아들 둘을 황태자위에서 내쫓고 죽이기까지 한 것은 이미 말했다. 측천무후는 소의 시절에 딸까지 죽인 것으로 악명이 높다. 무 소의가 딸을 출산했다는 소식에 황후가 처소를 방문했다. 이 때 방에는 아기만 있었다. 황후는 아기를 어르고 돌아갔고 곧 고종이 찾아왔다. 무 소의가 아기를 보여주려고 이불을 젖히자 아기는 죽어 있었다. 소의가 울부짖으며 방문했던 자가 있었는지 묻자 시녀가 답했다. “황후께서 찾아오셨다 돌아가셨습니다.” 이후 고종은 황후를 의심하게 되었고 무 소의는 황후가 자신을 저주하는 주술 행위를 했다고 무고하여 황후를 더욱 깊은 곤경에 빠뜨렸다. 치열한 권력 투쟁 끝에 655년 황후와 소 숙비를 폐하라는 조칙이 내려졌다. 무 소의는 드디어 황후가 되었다. 황궁에 다시 들어 온지 4년 만의 일이다. 측천무후는 서인이 된 황후와 소 숙비 즉 왕씨와 소씨 두 여인에게 곤장 100대를 치고 손발을 자른 뒤 술 항아리에 산채로 넣어 죽였다. 황태자 이충(李忠)을 폐위시키고 자신의 장남 이홍을 황태자로 앉힌 것은 이듬해의 일이다.

 

측천무후는 실권을 장악한 다음부터 공포 정치를 폈다. 그가 권력을 장악하기까지 또 권력의 정점에 오른 다음까지 포함하여 죽인 사람이 93명에 달한다는 주장이 있다(그 가운데 23명이 자신의 가족 및 친족). 93명이라는 숫자도 연루되어 희생된 많은 사람들의 숫자는 뺀 것이라 한다. 측천무후는 잔인한 폭군에 불과한가? 중국 역대 황제들의 정치를 감안할 때, 측천무후를 특별히 정도가 심한 폭군으로 지목하기는 힘들다. 여성이라는 점 때문에 그 잔인성이 유달리 부각되었다고도 볼 수 있으니, 측천무후 입장에서는 억울한 일이라할까. 더구나 측천무후의 치세는 정치적으로는 공포 시대였을지언정 백성들의 생활 측면에서는 대체로 안정을 누린 시기였다. 물론 그 안정이란 측천무후의 공이기보다는 당 제국의 기반이 그만큼 튼튼했기 때문이었다. 측천무후는 권력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데에 관심이 있었을 뿐이다. 요컨대 그는 권력의 화신이었다. 물론 정치적 공적도 있다. 명문 귀족 출신이 아니었던 측천무후는, 가문과 혈통 중심의 아니라 능력 위주의 관료 등용이라는 기풍을 진작시켜 당나라의 전성기를 예비했다는 평가도 받는다. 문화적으로도 그는 당시의 뛰어난 많은 문인들을 적극 우대하여 화려하고 탐미적인 문풍(文風)이 꽃필 수 있게 했고, 불교 숭상을 통해 중국 불교의 융성과 발전에 기여한 바가 있으며, 공예, 도자기, 건축 등에서 당나라 특유의 미적(美的) 기풍을 진작시키는 데에도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여러 역사서들이 전하는 측천무후의 유제(遺制), 즉 유언에 따르면 그는 “황제의 칭호를 거두고 측천대성황후(則天大聖皇后)라 칭하라” 명했다. 복위한 중종은 어머니에게 측천대성황제(則天大聖皇帝)의 존호를 올리며 존중했지만, 황제의 칭호를 고집한다는 것은 무씨의 종묘사직을 고집한다는 뜻이 되고, 이것은 측천무후 자신의 사후에 무씨에 대한 적대감을 고조시킬 수 있었다. 측천무후는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정치력을 발휘한 셈이다. 이에 따라 측천무후는 고종의 황후로 간주되었으며 주나라 황제였다는 사실은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인정받지 못했다.

 

측천무후는 무씨 집안 인물, 특히 자신의 조카 무승사를 후계자로 세울 생각도 했지만 봉각시랑 이소덕이 간하는 말을 듣고 깨달은 바 있어 이씨로 하여금 뒤를 잇게 했다(중종의 뒤는 폐위되었던 예종이 이었다). “폐하께서 천하를 가지셨으니 자손에게 물려줌은 만대의 사업을 위한 것입니다. 어찌 조카를 후계자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조카가 천자를 위하여, 즉 고모를 위하여 묘를 세웠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또한 폐하께서는 천황(고종)의 유조를 받으셨으므로 만일 천하를 무승사에게 주시면 천황께서는 편안히 눈을 감지 못하실 것입니다.” 측천무후에 대한 평가는 매우 다양하다. 예컨대 아들을 폐위시키거나 죽인 것에 대해서도 개인적 권력욕에서 비롯되었다는 시각과, 당 제국의 안정을 위해 부적합하다고 판단하여 그렇게 했다는 시각이 엇갈린다. 후대의 분분하게 엇갈리는 평가를 예상이라도 했던 것일까? 측천무후를 기리는 비석에는 글자가 새겨져 있지 않다. 이른바 무자비(無字碑)다.

 

 

<측천무후>(도야마 군지 지음, 박정임 옮김, 페이퍼로드)

일본의 저명한 중국사학자가 쓴 책이지만, 어렵지 않게 그리고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측천무후에 관한 다양한 연구 성과를 반영하고 있으며, 저자는 측천후무를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 평가하기보다는 가능한 한 객관적 종합적으로 살펴보려 한다. 

 

<무측천 평전>(조윤문, 왕쌍희 지음, 김택중 외 옮김, 책과 함께) 

측천무후의 시대에 관한 다양한 사료의 발췌번역문이 실려 있는 것이 큰 장점이다. 일차 사료에 바탕을 둔 서술도 매우 자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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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측천무후의 과보다는 공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보다 적극적 긍정적으로 평가하려는 태도를 보여준다. 

 

<측천무후>(샨사 지음, 이상해 옮김, 현대문학)

범상치 않은 영욕의 삶을 산 한 여성으로서의 측천무후의 내면에 초점을 맞춘 소설이다. 간결하면서도 비장하고 극적인 문체가 흡인력을 발휘한다. 주의사항 하나. 이 ‘소설’은 어디까지나 ‘소설’이다. 요컨대 ‘역사’로 대하지는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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