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뉴스

호치민

klgallery 2009. 2. 11. 15:18

호치민


마땅히 시야는 넓게, 생각은 치밀하게,
때때로 공격은 단호해야 한다.
길 잘못 들면 쌍차(雙車)도 무용지물이나,
때를 만나면 졸(卒) 하나로도 성공한다.
                  -호치민의 옥중시 <장기를 배우며 2>(안경환 역)

 


1930년 2월 3일 홍콩의 주룽. 노동자 마을의 작은 집에 베트남의 공산주의 운동가들이 모였다. 국외에서 활동하고 있는 베트남의 혁명세력은 세 분파로 나뉘어 갑론을박하고 있었다. 이에 베트남 혁명세력의 실질적 지도자인 호치민(당시 이름은 응우옌 아이 쿠옥)이 회의를 소집한 것이다. 먼저 자신을 소개한 호치민은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우리는 분열해 있는 혁명세력을 하나의 당으로 뭉쳐야 합니다. 그래야 프랑스 제국주의와 싸울 수 있습니다.” 호치민의 말에는 거역할 수 없는 힘이 실려 있었다.

 

혁명가들은 통합정당의 이름에서부터 하나하나 의견을 좁혀나갔다. 그리하여 베트남 공산혁명 세력의 공식적인 통합정당인 ‘베트남공산당’이 탄생하였다. 보안을 위해 장소를 옮겨가며 회의를 하는 동안 호치민은 지나온 세월을 반추하면서 감회에 젖곤 했다. 그의 나이 이제 40이 넘었으니, 고국을 떠난 지 20년이 다 되었다. 오직 조국 베트남의 백성들에게 행복을 되찾아주리라 결심하고 떠난 길이었다. 경찰에 쫓기면서 하루도 편안하게 눈을 붙일 수 없었던 세월, 아직도 갈 길은 멀었지만, 이제 초석을 놓았다는 마음에 호치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엄밀히 말해 호치민의 베트남공산당은 레닌의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약칭 코민테른)이나 마오 쩌둥의 중국공산당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호치민에게는 식민 지배를 받고 있는 조국의 현실을 타개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급선무였다. 호치민은 프랑스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베트남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지식인, 중농, 프티 부르주아지만이 아니라 의식 있는 부르주아 민족주의 그룹도 혁명세력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공산주의자 이전에 민족주의자임을 말해주는 호치민의 이러한 생각은 새 통합정당의 강령에 반영되었다. 그러나 베트남공산당의 2월 강령에 대해 코민테른은 부분적으로 문제점을 지적했다. 강령의 민족주의적인 색채가 문제였다. 10월에 소집된 회의에서 민족주의적인 색채를 제거한 새로운 강령이 채택되었고, 그에 따라 당명도 ‘인도차이나공산당’으로 바뀌었다. 이는 베트남뿐만 아니라 캄보디아나 라오스 등 인도차이나를 형성하는 세 나라의 혁명을 함께 추구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었다. 민족 독립을 우선시하고 이를 위해 중간 계급의 협조를 구하고자 했던 호치민의 전략은 은근히 묵살되었지만, 호치민은 새로운 강령을 선선히 받아들였다. 받아들일 것은 군말 없이 받아들이고, 확신이 서면 단호하게 실천에 옮기는 것, 그것이 호치민의 크나큰 장점이었다. 온화하면서도 단호하고, 단호하면서도 넓은 그의 성품이야말로 성공의 일등 공신이었다.

 

 

호치민을 영웅으로 만든 것은 8할이 시대상황이었다. 19세기 중반 프랑스인들은 베트남의 가톨릭교도들을 보호한다는 명목 아래 베트남을 침공하여 식민지 인도차이나를 건설했다. 베트남에 들어온 프랑스인들은 자본주의 방식에 따라 대규모 고무농장 등에 자본을 투입하여, 베트남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바꾸고자 했다. 불교와 유교를 근간으로 하는 공동체적인 생산양식을 존중하는 베트남 사람들에게 자본주의는 야만적인 것이었다. 호치민의 아버지 응우옌 신 삭은 의식 있는 유학자였다. 일찍 부모를 여읜 그는 어렵게 공부하여 베트남어로 ‘포 방’이라고 하는 2급 박사학위를 땄다. 그럼에도 그는 식민지 관료체제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는 아내의 죽음을 핑계로 조정의 관직 임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버지의 이러한 성격이 아들 호치민에게도 그대로 이어졌음은 물론이었다. 호치민의 이름은 여럿이었다. 어린 시절의 이름은 응우옌 신 쿵이었고, 11살 이후의 이름은 응우옌 탓 타인(성공할 사람이라는 뜻)이었으며, 외국에서 활동할 때는 여러 가지 가명을 썼는데 가장 자주 사용한 이름은 응우옌 아이 쿠옥(애국자라는 뜻)이었다. 지금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호치민(胡志明)이라는 이름은 1940년 중국 기자로 행세하면서 쓴 것이다. 어린 시절 이름을 바꾸는 것은 베트남의 전통이었지만, 호치민은 늘 경찰에 쫓기는 몸이었기 때문에 신분을 감추기 위해 가명을 썼다. 이 여러 가지 이름 속에 성공한 애국자 호치민의 생애가 상징적으로 들어 있다.

 

 

11살의 호치민, 당시 이름으로 응우옌 탓 타인은 아버지 밑에서 고전 공부를 하다가 아버지의 친구 부옹 툭 쿠이가 가르치는 지역 학교로 가게 되었다. 쿠이는 학생들에게 고전을 달달달 외게 하지 않고 유교 경전의 인본주의적인 핵심을 전달하려고 애썼다. 아울러 학생들에게 베트남의 독립을 옹호하는 정신을 불어넣었다. 호치민은 새로운 스승 밑에서 너무도 즐거웠다. 그러나 나라를 잃은 슬픔에 피가 끓어오른 스승은 결국 독립운동에 합류하기 위해 학교 문을 닫고 떠났다. 소년 호치민은 다시 아버지에게로 돌아와 고전 공부를 계속했다. 아버지는 한문을 공부하여 무작정 공직에 나가려 하지 말고, 고전의 속뜻을 이해하고 사람들을 이롭게 할 방법을 찾도록 하라고 가르쳤다. 호치민은 이 무렵 유학 경전보다는 <삼국지>와 <서유기> 같은 옛날 이야기가 더 재미있었다. 호치민은 또 마을의 대장장이 지엔을 좋아했는데, 그에게서 용광로를 사용하는 방법을 배우기도 하고, 그를 따라 새 사냥을 가기도 했다. 저녁이면 지엔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지엔은 독립운동가들이 오랑캐를 몰아내려다 실패한 이야기를 실감나게 해주었다. 호치민은 민족주의자 부옹 툭 마우가 자살한 이야기와 판 딘 풍이 병사들을 잃고 피신했다가 이질로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호치민은 동네에서 구할 수 있는 책이 대부분 베트남 역사가 아니라 중국 역사를 다루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조국의 역사를 알기 위해 성도인 빈까지 걸어가기도 했다. 그는 서점에서 베트남 역사서를 탐독하고는 중요한 구절들을 암기해와서 친구들에게 들려주었다. 호치민은 이렇게 어린 시절의 환경에 의해 또는 스스로 역사적 소명의식을 키워나갔다. 이웃 마을에는 유명한 학자이자 애국자인 판 보이 차우가 살고 있었다. 차우는 호치민에게 근대화된 일본을 배우고자 하는 동유(동쪽에 있는 일본으로 유학 간다는 의미) 운동에 합세할 것을 권유했다. 호치민은 일본인에게 기대는 것은 “앞문으로 호랑이를 몰아내고 뒷문으로 이리를 불러들이는 것과 한가지”라고 생각하며 거절했다. 만약 이 제안을 수락했다면, 호치민은 공산주의 혁명가가 아닌 우익 독립운동가가 되었을 수도 있다.

 

 

사실 호치민을 영웅으로 만든 것은 8할이 용기였다고 해야 옳다. 그는 새로운 일을 시도하는 데 신중하기는 했지만, 확신이 서면 항상 과감했다. 어렸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납세 거부 시위에 참여하여 국학에서 퇴학당한 후에도 결코 낙담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새로운 세계에 눈을 돌리는 계기로 삼았다.

 

 

 

1911년 6월, 그는 드디어 프랑스 기선 아미랄 라투셰 - 트레빌 호에 주방보조로 취직하여 베트남을 떠난다. 이제 호치민에게 본격적인 떠돌이 생활이 시작되었다. 프랑스와 미국과 영국과 러시아와 중국이 보이지 않는 주연 호치민이 연기하는 무대였다.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선언하자, 호치민은 베트남 독립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들고 연합국 지도자들을 직접 찾아갔고, 윌슨에게는 편지를 썼다. 호치민의 무모할 정도의 추진력과 과감성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세계를 돌아다니는 동안 호치민은 프랑스에도 영국에도 피폐한 삶의 노동자가 존재하고, 또 양심적인 지식인이 있음을 발견했다. 그것이 그를 차츰 사회주의 운동에 몸담게 하는 당위성을 제공했다. 1924년 6월 호치민은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5차 코민테른 대회에 프랑스공산당 대표로 참석하여 세 차례에 걸쳐 연설을 했다. 그는 아시아의 식민지 문제와 농민의 역할에 대해 힘주어 강조했다. 이 인상적인 연설은 화제가 되었지만, 농민의 역할을 강조한 것이 이단적이라는 이유로 나중에 제재를 당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새로운 공산주의 지도자의 탄생을 예고하는 사건임에 틀림없었다.

 

 

무엇보다도 호치민을 성공으로 이끈 에너지는 열정이었다. 그는 베트남 민족 해방의 열망 하나로 평생 꿈 속에서도 꿈을 꾸었다. 그 꿈은 1945년 정말 꿈처럼 찾아왔다. 일본이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후, 인도차이나공산당은 전국인민대회를 소집하여 하노이를 점령했다. 민족해방위원회를 소집하여 호치민을 주석으로  내각을 구성한 혁명세력은 9월 2일 바딘 광장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 그들은 조물주로부터 누구에게도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 받았다. 생존, 자유, 행복의 추구 등이 바로 그 권리이다.”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호치민의 목소리가 온 세상에 울려 퍼졌다.

 

이 인용구절은 미국의 독립선언서(1776)의 한 대목과 같다. 또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한 권리를 가지고 태어났다”라고 천명한 프랑스 인권선언(1789)과도 맥락을 같이한다. 베트남민주공화국의 독립선언이 묘하게도 이후 첨예하게 대립할 프랑스와 미국이 애초에 세웠던 근대 혁명정신과 동일한 것이었으니, 생각하면 쓴웃음을 짓게 하는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꿈 같은 행복은 오래 가지 못했다. 베트남 독립은 사실상 반 토막이 되고 말았다. 1954년 제네바 협정에 의해 베트남은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남북으로 갈라지게 된 것이다. 이제 호치민의 열정은 독립이 아니라 통일 쪽으로 향했지만, 통일 또한 미국이나 프랑스 등의 열강으로부터 진정으로 독립하는 것이었다. 이해관계가 대립된 이상 전쟁은 필연이었는지 모른다. 1964년 8월 이른바 ‘통킹 만 사건’으로 시작된 베트남 전쟁은 1975년까지 베트남을 온통 피로 물들인 현대사 최고의 비극이었다.


 

현대사 최고의 비극이 진행되는 동안 폐결핵이 호치민의 건강을 위협하고 있었다. 호치민은 죽음에 대비하여 유언장을 작성했다. 1965년에 처음 작성하고 이어 1968년과 1969년에 손으로 고쳐 쓴 유언장은 베트남 인민의 생활 수준을 높이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함께 추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있었다. 1969년 9월 2일 호치민은 그토록 열망했던 조국의 통일을 보지 못하고 일생을 힘차게 가동했던 숨을 멈추었다.

 

 

실로 호치민의 일생은 조국의 운명과 함께 한 것이었다. 조국이 노예 상태였기에 그는 외국을 돌아다니며 온갖 험한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닥쳐도 참고 때를 기다렸으니, 그의 일생이야말로 성공의 교과서와도 같은 것이다. 마른 몸매에 약간 겁먹은 것 같은 베트남인 특유의 큰 눈, 한없이 인자하고도 부드러운 표정 속에 호치민의 에너지가 들어 있었다.

 


호치민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전 세계의 언론이 그에 관한 기사를 대서특필했다. 듀이커가 평전에서 인용한 우루과이의 한 신문은 “그는 우주만큼 넓은 심장을 가진 사람이었으며, 아이들에 대한 가없는 사랑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모든 분야에서 소박함의 모범이다”라고 극찬했다. 분명히 그는 권력을 통해 어떠한 부귀영화도 누리지 않았고, 조금의 안락도 추구하지 않았으며, 끝내 친근한 ‘호 아저씨’의 이미지를 안고 떠났다.

 

호치민이 유언장에서 “내가 죽은 후에 웅장한 장례식으로 인민의 돈과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내 시신은 화장해달라”라고 주문한 것은 그의 인품을 그대로 말해준다. 권력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한결같았던 인품 속에서 그의 탁월한 정치력과 추진력이 솟아나왔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에게도 미래에 대한 불안감, 개인의 안위에 대한 걱정이 있었음을 짐작한다. 1930년 2월 3일 이국 땅 홍콩에서 베트남공산당을 결성하던 이들의 떨리는 손길이 아직도 우리 가슴 속을 스산하게 흔드는 이유다. 우리의 독립투사들도 외국에서 독립군을 조직할 때, 임시정부를 수립할 때 그들과 똑같은 심정이었으리라. 오늘 따라 호치민의 옥중 시 한 편이 가슴을 울린다.

 

엄동설한의 초라함이 없다면,
따스한 봄날의 찬란함도 결코 없으리.
불운은 나를 단련시키고,
내 마음을 더욱 굳세게 한다.

                      - <스스로 권면하며>

 

 

윌리엄 듀이커 지음, 정영목 옮김, <호치민 평전>(푸른숲, 2003)은 지독하게 꼼꼼한 평전이다. 최대한 자세하게 서술하면서도 실증적인 태도를 잃지 않았으며, 확실한 근거에 따라 분명한 사실을 기술하려고 애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듀이커가 묘사하는 호치민의 삶은 이념을 떠나 눈물겨운 감동을 선사한다. 주지하다시피 혁명이란 기존의 체제를 뒤집는 것이니 한편으로 위험한 것이기도 하지만, 호치민의 여유 있는 성격은 물 흐르듯이 무리하지 않고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했다. 성공을 꿈꾸는 이들이여, 호치민의 생애에 성공의 비결이 있다!


호치민 평전호치민-혁명과 애국의 길에서옥중일기

 

다니엘 에므리 지음, 성기완 옮김, <호치민 - 혁명과 애국의 길에서>(시공사, 1998)는 디스커버리 총서의 한 권이다. 프랑스인이 쓴 책으로 원래 프랑스의 출판사에서 나온 책이다. 그럼에도 베트남 역사로부터 차분하게 전개되는 책의 내용은 대단히 객관적이다. 듀이커의 <호치민 평전>에 호치민의 유언장이 수록되지 않아 아쉬웠는데, 이 책에 그 유언장 원문이 실려 있다. 그러나 두 권의 책에 호치민이 9월 2일에 낭독한 독립선언서 전문이 수록되지 않은 것은 유감이다.

 

호치민의 <옥중일기>(안경환 역, 지만지, 2008)는 호치민이 옥중에서 쓴 한시를 번역한 책이다. 호치민은 두 번에 걸쳐 감옥 생활을 한다. 1931년 6월 홍콩에서 영국 경찰에 체포되어 1932년 12월까지 복역했으며, 1942년 8월 중국 경찰에 체포되어 1943년 9월까지 복역했다. 두 번째 감옥생활 중 호치민은 한시를 쓰게 된다. 마음이 산란하여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때, 이 책의 시 한 편씩 읽어보길 권한다. 머리는 차가워지고 가슴은 뜨거워질 것이다. “아득히 기나긴 밤 잠 못 이루어, /백여 편의 옥중시를 지었네. /시 한 편 짓고 나서 붓대를 내려놓고, /감방 문을 통해서 자유 하늘 바라본다.”(<잠 못 이루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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