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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 선생이 남긴 '인생의 지혜' 를 생각하다 | |
박경리는 흙의 작가, 생명의 작가였다. 물이 흐르듯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려 하지 않았다. 억지로 생명을 연장하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 박경리는 흙으로 돌아갔다. |
| 옛날의 그 집’은 박경리 선생이 숨을 거두기 한 달 전 발표한 유작이다. 뭔가를 예감한 것일까.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는 표현은 마치 먼 여정을 떠나기 전의 심경을 담아놓은 듯하다. 선생은 또 “자신은 불효자였다”며, “오늘 밤 꿈에서라도 어머니를 뵐 수 있으면 좋겠다”며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나타냈다. 그 마음을 담은 시가 바로 ‘어머니’이다. 이 시를 발표하고 한 달 뒤 선생은 30년 전 어머니가 간 길을 뒤따랐다. 영결식이 있던 날은 때마침 ‘어버이날’인 5월 8일로 우연이라고 하기엔 가슴이 아프다. 1999년 <현대문학>에 시를 발표한 이후 선생은 9년 만에 무엇엔가 쫓기듯 서둘러 시 3편을 발표했다. 창작시 3편을 발표하고 고향인 통영을 방문한 뒤 건강은 급격히 악화되었다. 선생이 세상을 떠나기 한 달 전인 4월 3일, 기자는 원주 토지문화관을 찾아 인터뷰를 요청했다. 그때 선생은 건강 상태가 좋지 않다며 인터뷰를 잠시 미루자고 했다. 하지만 그것이 마지막 모습이 될 줄이야. 기자로서 ‘마지막 인터뷰’를 놓친 것도 안타깝지만, 무엇보다 너무 일찍 가셨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다. 5월 5일, 선생은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살아생전 가장 좋아하던 단어 ‘꿈·새·숲·일·감성·시인·투명·존엄·길·시골’을 뒤로한 채. 선생의 딸 김영주 토지문화관장은 “어머니가 아름답게 사셨기 때문에 죽음도 참으로 아름답게 맞이하셨다. 토지문화관에 들렀을 땐 마치 현관문을 열고 어머니가 나오실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며 눈물을 흘렸다. 박완서 작가는 “선생님이 계셨던 단구동 집은 제 친정집이었고 선생님은 제 친정 어머니였다. 제일 힘들 때 손수 지으신 밥과 배추 속거리로 끓인 국을 먹이셨던 선생님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지…”라며 목이 매였다. 소설가 신경숙씨는 “자신에게 늘 빛이 되어주셨던 큰 스승이었는데, 이렇게 가시다니 마음이 아프다”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박경리의 <토지>는 광복 이후 한국 문학이 거둔 최대의 수확으로 일컬어진다. 1969년 집필을 시작해 1994년 8월 15일, 25년 만에 거대한 마침표를 찍었다. <토지>에 등장하는 인물만 8백여 명, 원고지 3만1천2백 매라는 기록은 아직 깨지지 않고 있다. 1971년 유방암 수술을 받고 붕대로 수술 자리를 동여매고도 선생은 집필을 멈추지 않았다.
내 삶이 행복했더라면 문학하지 않았을 것
여자로서 어머니로서, 선생의 삶은 평탄치 않았다. 오히려 소설보다 더 굴곡진 삶을 살았다. 선생은 “나는 어머니에 대한 연민과 경멸, 아버지에 대한 증오, 그런 극단적인 감정 속에서 고독을 만들었고 책과 더불어 공상의 세계를 쌓았다”고 사춘기 시절을 회고했다. 1946년 결혼해 가정을 꾸렸지만 한국전쟁 통에 남편을 여의었고 뒤이어 아들도 잃었다. 유일하게 남은 혈육인 딸은 남편(김지하 시인) 옥바라지로 호된 곤욕을 치렀다. 망국의 식민지 전쟁 그리고 독재시대를 살아오며 선생만큼 인고의 세월을 보낸 이도 없다. 선생은 데뷔 직후 “내가 행복했더라면 문학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불행했기 때문에 문학을 했다”고 고백했다. 선생은 인터뷰에서 “나는 전쟁 미망인 이었어요. 불행의 상징이죠. 가난하고, 애 데리고, 부모 모시고, 혼자 벌어먹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소망이 있기에 써온 것이죠. 불행에서 탈출하려고요”라고 말한 적이 있다. 훌륭한 작가가 되느니 차라리 평범한 인간으로서 행복한 인생을 살고 싶다는 ‘자기 고백’은 지난 세월이 얼마나 모질었는지를 대변해준다. 통영 출신인 선생이 서울 정릉에 살다 원주시 단구동으로 거처를 옮긴 건 1980년. 남편을 옥에 빼앗기고 혼자 마음고생하고 있는 딸 김영주씨에게 의지가 될까 싶어 짐을 싼 것이다. 선생은 2007년 발표한 산문집 <가설을 위한 망상>에서 원주에 내려오게 된 이유를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원주로 옮겨온 건 20년 전의 일입니다. 딸아이와 손자가 남편도 없이 애비도 없이 시가에 살고 있었기에 울타리가 되어주자고 서울 살림을 걷고 원주로 내려왔던 것입니다.… 어떤 분은 내가 글쓰기 위해 원주로 왔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그건 내게 사치스러운 것이었습니다. 나는 인생만큼 문학이 거룩하고 절실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단구동의 뜨락은 꽤 넓었고 그것이 내 세계의 전부였습니다. 삶은 준열하고 나날의 노동 없이는 내 자신이 분해되고 말 것만 같았고 긴장을 푸는 순간 눈을 감은 채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 것만 같았습니다. 모든 것을 거부하고 포기했으며 오로지 목숨을 부지한 것은 가엾은 내 딸, 손자의 눈빛 때문입니다. 그때 머리가 다 빠지고 철색으로 변한 딸아이의 얼굴은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 내 마음속의 짙은 피멍입니다.” -<가설을 위한 망상> 중에서
원주로 내려간 이후의 삶은 집 옆에 텃밭을 일궈 푸성귀를 키우면서 글을 쓰다가 막히면 밭에 나가고 밭일을 하다가 생각이 떠오르면 다시 책상머리에 앉는 그런 생활의 연속이었다. 선생의 글에는 외손자 ‘원보’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원보가 태어난 지 일주일 후에 아버지(김지하)가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돼 교도소에 들어갔다. 원보는 일곱 살이 될 때까지 아버지 얼굴을 제대로 못 보고 컸다. 선생은 이런 손자를 업어 키우며 애틋한 정을 쏟았다. 원보씨는 할머니의 후광을 받지 않겠다는 결벽증이 있었다. 어디 가서 우리 할머니 아무개, 우리 아버지 아무개라고 절대 말하고 다니지 않았다. 그는 서울예대 문창과를 뒤늦게 다니다 2007년 등단했다. 그는 SF 판타지 소설 작가다. 부모 세대와는 확실한 선을 그은 셈이다. 선생은 자신의 손으로 업고 기른 손자들이었기에 유난히 애정이 깊었다. 손자들이 보고 싶을 때면 어렸을 적 그린 그림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리움을 달랬다고 한다. 손자 원보씨가 네 살 때 그린 그림을 표지화로 넣은 선생의 첫 번째 시집 <못 떠나가는 배>에서 ‘시에서 느낄 수 있는 힘이란 그리움의 끝에서 오는 것’이라고 했다. 선생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탓일까? 영결식이 있던 날 선생의 영정은 원보씨가 모셨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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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생명에 대한 큰 애착
선생에게 농사일은 각별한 즐거움이었다. 누군가 ‘가장 기쁠 때가 언제냐’고 물으면 선생은 ‘내가 키운 고추를 잘 말려서 꼭지를 딸 때’라고 답할 정도였다. 고추 농사는 손이 많이 가 그만큼 애착이 크단다. 이처럼 선생의 문학에는 자신의 삶이 오롯이 녹아 있다. 선생은 늘 ‘삶이 문학보다 우선’이라고 말했다. 생명에 대한 애착도 컸다. 날씨가 가물면 잔디와 나무, 키우는 채소가 목마르다고 애가 타서 원고 쓰는 일도 제쳐두고 달려가서 물을 줬다. 겨울에는 먹을 게 없어 고양이 밥그릇에 덤비는 까치가 불쌍하다고 바위 위에, 나무 위에 고기 기름을 놓아주었다. “대관절 어쩌려고 이러는 건가. 어디까지 가야만 사람들은 직성이 풀리는 걸까요. 뽑히고 버려지고 멸종하는 초목, 깎이고 막혀버리고 숨통이 죄어드는 산천, 갈 곳을 잃고 죽어가는 조수, 넋이 있다면 통곡이 지상에 충만할 것을… 다만 생존만을 원하며, 세상이 막히지 않고 돌아가게 자리매김한 생명들을 무더기 무더기 대량 학살하는 것이 과연 합당한 것인지, 신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신의 뜻으로 생각하는지요. 달리는 기차 앞에 나무 막대기 하나의 역할도 못하면서 나는 왜 지치지도 않고 지껄여야 하는지요.” -2003년 <현대문학>
선생은 삶, 즉 모든 생명에 대해 눈을 뜨고, 문학도 모든 생명에 대한 관심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생명에 대한 연민이 있을 때 비로소 좋은 작품이 탄생한다는 것이다. “가장 순수하고 밀도도 짙은 것은 연민이에요, 연민. 연민이라는 것은 불쌍한 것에 대한 것, 말하자면 허덕이고 못 먹는 것에 대한 것, 또 생명이 가려고 하는 것에 대한 설명이 없는 아픔이거든요. 그것에 대해 아파하는 마음, 이것이 사랑이에요. 가장 숭고한 사랑이지요.” 이처럼 만년의 선생은 생명과 환경의 가치를 설파했으며, 후배 작가들을 뒷바라지하며 ‘하숙집 아줌마’를 자처했다. 문학 지망생들에게 글을 쓸 수 있는 공간과 손수 재배한 상추와 고추로 음식을 만들어주었다. 이제 선생은 새로운 세상에서 피곤한 육신을 누이고 조금은 휴식을 취할지도 모르겠다. 그곳에서 꿈속에서나마 보고 싶어 하던 어머니와 한국전쟁 때 먼저 떠난 남편, 그리고 가슴에 묻은 아들을 모두 만나 가슴속 응어리를 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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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동딸 김영주 관장이 말하는 ‘나의 어머니 박경리’
김지하 시인의 아내이자 선생의 딸 김영주 관장은 <토지> 완간 기념 문집 <곁에서 본 토지>(솔출판사)에서 어머니 박경리에 대한 단상을 적었다. 그 일부를 발췌했다. ‘어머니에 대한 온갖 상념들 가운데 이상하게도 내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고 맴도는 것은 어머니의 천진난만한 미소이다. 아마도 그것은 이 천진난만한 미소가 어머니 본래의 성품이어서가 아닌가 싶다. 그리고 이 성품이 어머니 예술혼의 근원이 아니었나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어머니의 이 같은 천진난만함은 세상으로부터 남다르게 생생한 상처를 무수히 받게 했으며 이 상처가 작품에 몰입하게 했고 작품 속에 나타나는 치열함 같은 것은 바로 그 표정이다. 어머니는 종종 마음의 상처를 견디지 못하시고 이 세상에서 유일한 혈육이었던 내 앞에서 탄식하시며 눈물을 흘리시고 혹은 통곡하시기도 했다. 지금도 잊지 못하는 기억은 오래 전 어느 연말 송년의 어수선함 속에서 고적했던 밤의 통곡이다. 마음 바닥으로부터 치밀어 오르는, 마치 창자가 끊어질 듯, 가슴이 터져버릴 듯 통곡하시던 그 음산한 밤을 나는 잊지 못한다. 그 무렵 어머니는 작가로서 별처럼 반짝이며 떠오르고 있었고 그것이 질시의 표적이 되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험한 말들을 들으셨던 것이다. (중략) 지금 생각해보면 그 상처, 아픔들이 어머니의 스승이었다. 마치 부서져버릴 듯 무너져버릴 듯 통곡하시고 난 다음 어머니는 단정하게 앉아 모질게 원고지 앞에서 펜을 들고 계시곤 했다. 끊임없이 쓰고 고치고 다시 쓰고 또다시 쓰고 옆에서 보기에도 진절머리가 나는 뼈를 깎는 작업을 계속하시었다. 나는 늘 “이제 원고 쓰지 말고 쉬세요” 하고 말해왔지만 지금은 “좀 쉬었다가 또 쓰세요”라고 말한다. 글 쓰는 일이 어머니의 삶과 더불어 있다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중략) 무슨 일이고 너무 꼼꼼하고 세밀하게 하다가 종내는 질려버리고 끝을 못 내기가 예사이던 어머니를 먹고살기 위해서 원고를 써야 하고 끝낼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준 것은 6·25이다. 아버지가 형무소에 계시다가 행방불명되고 어린 자식과 늙은 어머니를 부양해야 하는 짐을 혼자 지고 살기 위해서 끊임없이 지겨울 정도로 글을 쓰고 또 써오셨다. 그 고통스러웠던 삶의 무게가 어머니의 작품 속에 모두 들어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머니의 고통, 외로움, 탄식이 깊은 만큼 작품이 빛을 발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예술가의 혼은 천형을 받은 것이라는 생각을 자주 하곤 했었다. 이제 어머니는 내가 항상 바랐던 것처럼 편안해지실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예전에는 아주 서러웠고 가여웠던 나의 어머니, 그러나 이제는 존경스러운 어머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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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박경리 선생의 글들
지리산의 수난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먹고살 만한 사람들에 의해 산은 신음하고 상처투성이다. 어디 지리산뿐일까마는 산짐승들이 숨어서 쉬어볼 만한 곳도 마땅치 않고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운 식물, 떠나버린 생명들, 바위를 타고 흐르던 생명수는 썩어가고 있다 한다. 도시 인간들이 이룩한 것이 무엇일까? 백팔번뇌, 끝이 없구나. 세사(世事) 한 귀퉁이에 비루한 마음 걸어놓고 훨훨 껍데기 벗어던지며 떠나지 못하는 것이 한탄스럽다. 소멸의 시기는 눈앞으로 다가오는데 삶의 의미는 멀고도 멀어 너무나 아득하다. -<토지> ‘서문’ 몇 토막
행·불행은 주기적으로 오고 가는 것으로, 그것이 비극이든 희극이든 삶 자체로서 경험과 지식, 지혜를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소유 개념으로 행·불행을 갈라놓는다고 했습니다만 결코 수치적인 것은 아닐 것입니다. 질적으로 보는 것이 진실에 가까울 거예요. 재벌이 행복하고 하루 벌어서 하루를 사는 사람이 불행하다는 공식은 없습니다. 사시사철 진수성찬을 먹는 사람은 오히려 성찬의 맛을 모르지만 땀 흘리고 나서 소찬을 대하는 농부들은 식사의 즐거움을 만끽하지요. -<가설을 위한 망상> 중에서
사람들은 수월하게 행과 불행을 얘기한다. 어떤 사람은 나를 불행하다 하고 어떤 사람은 나를 행복하다 한다. 전자의 경우는 여자의 운명을 두고 한 말이겠고 후자의 경우는 명리(名利)를 두고 한 말이 아니었나 싶다. 혹은 잡사(雜事)에서 손을 떼고 일에 전념하는 것을 두고 한 말인지 모르겠다. 그들 각도에서 본 행, 불행에는 각기 타당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때론 노여움을, 때론 모멸감을 느끼며 그런 말을 듣곤 한다. 애매모호하기 때문이다. 무궁무진한 인생의 심층을 상식적으로 가려버리는 짓이 비겁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분류되는 불행, 그렇게 가치 지어지는 행복이라면 실상 그 어느 것과도 나와는 인연이 있을 성싶지 않았다. -1973년 <토지> 서문 중에서
싱그러운 꽃을 피우고 많은 열매를 맺은 나무는 이듬해 초라한 열매 몇 알밖에는 맺지 못하는데 그 이유를 우리는 안다. 옛사람들은 비행이나 비정을 꾸짖을 때 자식 키우는 사람이 그래서는 안 된다고 했다. 또 착하고 따뜻한 마음씨를 칭찬할 적에 자식 키우는 사람이라 다르다고 했다. 생명을 기르는 온유한 눈빛은 지금 어디로 갔는가. 상자 속 같은 아파트에서 공부하라고 아이들을 다글다글 볶아대는 엄마, 남에게 이겨야 한다는 것이 금과옥조다. 엄마뿐이랴, 세상이 모두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그리고 소위 이긴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만 성찬을 베푸셨다고 은연중 생각하며 신을 공범자로 함부로 변조시킨다. 소젖을 먹고, 가공식품을 먹고 자라나는 아이들, 장차 그들은 어쩌면 산고에서 해방될 것을 계책할지 모를 일이다. 모든 것은 상자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유형, 무형 모두가, 닭도 돼지도 소도 어미 노릇을 안 하게 된 지 오래인 것 같다. 사람도 짐승도 모두 그런 물결을 타고 신비가 쥐어준 열쇠는 어디다 버렸을까. 언젠가 나는 자연에 도전한 인간들은 자연에 의해 보복을 당할 것이란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 생각이 옳지 못했음을 느꼈다. 자연은 변함없는 길손이며 친절하지도 불친절하지도 않다. 설령 지구가 깨져버린다 할지라도 우주는 침묵할 것이다. 사람은 자기 자신에 의하여 보복 당할 것이다.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인간이며 또 열쇠를 버리는 것도 인간이기 때문이다. -<원주통신> 중 ‘온유한 모성은 어디로’ 중에서
생명은 아픔이요, 생명은 사랑이다. 아픔과 사랑이 사라져가는 세상, 나는 인간에 대하여 혐오를 느낄 때가 많다. 아픔과 사랑이 없을 때, 생명은 존재할 수 없고, 따라서 생존도 확인할 수 없는 것 아닐까. 거대한 기계문명, 그것으로 인한 발전과 더불어 보다 사악하고 전투적이며 미래를 망각한 오늘의 물질적 충족에 급급한 인간상을 본다는 것은 절망이다. 하루에도 수차례 절망에 사로잡힌다. 생명은 개성이다. 생명에 동일한 것은 없다. 다만 동일한 것이 있다면 생명은 생명을 기른 것뿐이다. -<원주통신> 중 ‘환상의 세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