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 신부는 대개 매일 새벽 5시에 미사를 드렸는데 사람들은 1시부터 나와 기도하며 성당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나도 자주 그렇게 했다. 4시가 되면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 큰 무리를 지어서 여러 언어로 기도했다. 멀리서 찾아온 사람들은 하룻밤 잠을 설치는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비오 신부의 제대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다가서려고 야단이었다. 4시 30분에 성당문이 열리면 순식간에 성당은 꽉 메워졌다. 비오 신부 역시 미사를 위해 매일 3시간씩 준비를 했기 때문에 그의 희생 또한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매일 4시 45분에 고통으로 비틀거리며 제의실에 들어오곤 하는 그는 매일 올리브 산의 고통을 겪었다. 비오 신부는 몇 발자국 내디뎌 기도석에 앉아 기도를 하고는 몇 분 뒤 다시 힘을 얻어 일어나 제의를 입고 새로이 무혈의 십자가 희생을 준비하곤 했다. 비오 신부에게는 일생동안 편한 날이 없었다. 지체 높은 사람들뿐 아니라 온갖 계층의 사람들이 여러가지 소망을 가지고 그를 고대하며 찾아왔기 때문이다.
비오 신부의 눈에는 자주 눈물이 고이곤 했다. 왜 그러느냐는 물음에 그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미사를 드리기에 합당치 않은 사람이오. 나야말로 가장 합당치 않은 사제요."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81세의 노인이 울고 있는 것이다.
5시 정각, 그는 많은 사람들 사이를 지나 힘겹게 제대로 나아간다. 그의 걸음걸이, 움직임,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고통스럽게 보인다. 비오 신부는 미사를 중앙제대에서 드렸는데, 세 방향에서 모두 그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정신을 집중하여 경건하게 미사를 시작한다. 오래 서 있는 고통과 오상의 고통이 어우러져 큰 고역을 겪고 있음이 역력하다. 가끔 가시관을 벗기라도 하려는 듯이 손을 이마에 대곤 한다. 이윽고 제대로 올라가 제대에 입을 맞추려 하지만, 이또한 이루 말할 수 없는 큰 고통이었다. 그는 하느님께서 끊임없이 지적하는 무서운 죄를 고통으로 짊어지고 속죄하는 중이었다.
그는 대영광송과 사도신경을 들으며 황홀경에 빠지곤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마치 그 내용을 모두 들여다보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비오 신부의 기도는 모두 그 표정으로 나타났다. 대개는 슬픈 표정이었고, 기쁜 표정을 짓는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 사람들은 비오 신부가 제대 중앙으로 가서 몸을 숙여 기도하는 것을 보며, 그가 울고 있다는 것을 비로서 알아차렸다. 제대에는 따로 눈물을 닦는 손수건이 놓여 있었다. '눈물손수건' 이라는 별명이 붙은 수건이었다.
그는 깊은 신앙과 사랑으로 복음 말씀을 읽었다. 성찬식에 들어가면 그는 성반을 든 채 자주 황홀경에 빠져들곤 했다. 그때 그는 자주 낮은 목소리로 보이지 않는 누구와 이야기를 나누곤했다. 동시에 그는 서면으로든 구두로든 그에게 맡겨진 수많은 사람들을 향해 몸을 돌려 팔을 들어올리면(가령,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라고 말할때), 꿰뚫려서 피로 물든 상처가 뚜렷이 드러났다. 상처의 고통과 오래 서 있는 데서 오는 고통은 점점 커져갔고, 곁에서 복사를 서며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제들이 말하듯이, 그의 표정은 바로 십자가에서 고통 중에 숨을 거두시는 구세주의 모습과 같았다.
이제 성변화 순서가 왔다. 성변화의 기도를 바치는 동안에 비오 신부의 몸은 거센 소나기를 맞고 있는 듯 했다. 그것은 진저리나는 고통과의 싸움이었으며, 그순간 양손에서는 선혈이 흘러나왔다. 비오 신부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신비하게도 그 죽음을 자기 몸으로 겪은 것이다.
사람들은 비오신부가 행여 죽기라도 할까 싶어서 흐느껴 소리쳤다.
“예수님, 자비를 베푸소서!”
비오 신부는 특히 단식기간에 이것을 여실히 체험하곤 했다. 그러나 가장 놀라운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희생을 무혈의 제사로 새롭게 재현하면서 비오 신부는 자신의 남김없는 헌신에 덧붙여 모든 것을, 아니 자기 심장의 피까지도 보탰다는 사실이다. 그의 온몸이 피와 땀으로 흥건해지면, 이것이 사람들을 큰 감동으로 뒤흔들어 놓았다. 순례자들 가운데는 감격에 겨워 큰소리로 “저는 믿습니다.”라고 외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모르기는 하지만, 영혼들이 회개를 위해 비오 신부는 미리 부터 관심을 가지고 고통을 받으며 속죄를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신앙을 달리 하는 사람들도 그 자리에서 많이 회개 했다. 성변화의 기도 시간이 5분이나 걸릴 때도 있었다. 그뒤에 비오 신부는 숨을 좀 돌렸지만, 그렇다고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이어서 비오신부는 경건한 마음으로 주님의 기도를 바쳤다. 그 자신이 성체를 영하기에 앞서 가슴을 치면서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할 때는 목이 메곤 했다. 눈물이 나와서 한참 지나서야 두 번째, 그리고 세번째 가슴을 치곤 했다. 그러고 나서 그리스도의 몸, 곧 성체를 영했다. 이때 그는 또 황홀경에 빠져들곤 했는데, 그런 그의 표정은 환하기 이를데 없었다. 그는 죽어서 하늘나라에 간사람에게나 가능할 천상의 기쁨과 희열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미리 겪은 모든 고통에 대한 보상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에게 맡겨진 매일의 중책을 감당해내는 힘의 원천이기도 했다. 오랫동안 그는 이 상태에 머물러 있곤 했다.
그는 깊은 생각에 젖어 마침기도를 하고 미사를 마친다. 그러고는 힘겨운 걸음으로 제의를 벗고, 호기심어린 시선을 피하기 위해 피를 빨아들이는 양모 반장갑을 다시 끼고는 수도원으로 돌아가 사람들과 감사의 인사를 나누었다. 제대 건너편에서는 흔히 멀리서 온 순례자들이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곤 했다. 그들은 회개하고 이탈리아식으로 나지막하게 소리쳤다
“아, 하느님을 이렇게 늦게서야 알게 되다니! 진작부터 안식을 찾아 나섰지만 얻지 못하다가 이제서야 찾게 되다니!” 그토록 갈망하던 안식과 평화를 이곳에 와서 찾은 그들은 통회하면서 고해소로 들어갔다. 이와같이 대개 1시간이 걸리는 비오 신부의 미사는 감동의 도가니였다. 어떤 사제는 비오 신부의 미사를 두 번 다시는 바로 볼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그 뒤로 이 사제는 미사를 아름답게, 정성을 다해 드리게 되었다.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게 오상을 받은 후로는 미사 때마다 손의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제대포를 적셨으며, 이 때문에 비오 신부는 원장신부에게 늘 미안한 마음을 가졌다. 그러나 얼마 뒤부터는 제의실에서 제대로 가는 사이에 피가 응고하는 은총을 받아 괜찮게 되었다. 비오 신부의 미사는 가장 값진 순간이었고, 그가 당하는 고통이 크면 클수록 사람들이 그를 통해서 받는 은총도 많았다. 그의 미사에 참석한 사람들은 일생을 통틀어 가장 큰 축복을 받았다. 그들은 미사 도중에 각자의 소원을 비오 신부에게 조용히 부탁드릴 수가 있었다.
82세 고령에 접어든 비오 신부는 제의실에 갈 때 휠체어를 이용해야 했다. 미사도 의자에 앉아서 드렸으며, 시간도 그전처럼 오래 걸리지 않았다. 미사를 전혀 못 드릴 때도 있었다. 그는 이전처럼 눈에 띠게 고통스러워하지도 않았고, 황홀경에 빠지는 경우도 드물었다.
비오신부는 말했다.
“세상은 해가 없어도 존재할 수 있지만 미사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 聖 비오 신부님 연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