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뉴스

[스크랩] 왜 사는지 몰랐습니다.- 류부연 -

klgallery 2008. 7. 28. 15:50
     
      왜 사는지 몰랐습니다. 
    컨디션은 좋은데 몸이 일어나질 않습니다.
    남편이 출근 준비하는 소리를 들으며 이불 속에서 뒤척입니다.
    행여 내가 잠을 깰세라 남편이 조심하고 있다는 걸 느낍니다.
    허리가 아픕니다.
    며칠째 허리의 통증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 통증은 아마도 상체의 기운을 하체로 보내려는 노력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믿으며 내 몸이 정상으로 돌아올 날을 기다립니다.
    그래서 통증이 두렵거나 불편하지 않습니다.
    그냥 느끼며 함께할 뿐입니다.
    몸을 웅크려도 보고 위아래로 쭈욱 늘이기도 하면서 
    오히려 통증을 가중시키기도 합니다.
    이불 속에서 남편을 배웅하고 앞산을 바라봅니다.
    한 달 전 하늘로 가는 기차를 타고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난 딸 
    생각이 납니다.
    그리고 딸이 떠나기 하루 전 날 밤이 생각납니다. 
    녀석은 2박3일 만에 집에 돌아왔고 녀석이 돌아오는 발소리를
    들으며 나는 자는 척했습니다.
    다음 날 밝은 기분으로 녀석의 얼굴을 보고 싶었습니다. 
    녀석은 불 꺼진 내 방으로 들어와 “엄마 자?” 하고 물었습니다.
    아무 말도 없는 나의 등을 녀석이 뒤에서 두 팔로 살며시 안았습니다.
    “엄마, 사랑해. 
     그리고  엄마 병 빨리 나아. 잘 자.”
    녀석은 이렇게 내 마음을 풀어주고 조용히 방을 나갔습니다.
    조용하고 따듯하며 친밀하던 모녀간의 느낌.
    세상에서 나만이 간직한 유일한 것입니다.  
    
    딸이 어느 날 말했습니다.
    “나는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어.”
    나도 그랬습니다.
    결혼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딸 하나, 아들 하나 키우며 학교에 근무하던 15년 동안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아이들이 자라고 내가 나이를 먹어가면서 ‘나는 무엇을 위해 사나?’
    하는 생각이 다시 들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답이 없었습니다.
    나이 마흔을 넘으면서 사람들의 부음을 자주 듣게 되었습니다. 
    특히나 암으로 죽는 사람들을 너무도 많이 보았습니다. 
    누가 암이라더라 하는 소릴 들은 지 두어 달이 지나면 그 사람
    죽었더라 하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남편의 가장 가까운 고교 동창도 마흔네 살에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났고 옆집에 살던 아들 녀석 친구의 아버지도 
    사십 초반에 폐암으로 가족 곁을 떠났습니다.
    남편 지인의 아내는 사십대의 여의사였습니다. 
    그분은 자신이 폐암인 것을 알고 치료를 포기하고 죽는 날까지
    진료를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속절없이 우리 곁을 떠나는 사람들을 보며 생각했습니다. 
    ‘암은 병원에서 치료할 수 있는 병이 아니구나, 내가 암에 걸린다면
    생명을 연장해보겠다고 병원에 가지는 않겠다.‘
    나도 
    암 환자가 되었고 얼결에 수술과 항암 치료를 받았지만 
    그 땐 남편을 설득할 용기가 부족했습니다.하지만
    암이 재발했을 때 나는 남편에게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다시는 병원에 가지 않을 거야.”
    한방 치료를 받으며 가끔 생각했습니다. 
    ‘왜 살려고 하는 거지?’
    역시 답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투병 2년 동안 참으로 귀한 보물을 얻었습니다. 
    돈으로는 어디서도 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다 얻은 듯 행복했습니다. 
    내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를 알게 된 것입니다. 
    새롭게 나를 발견하기 시작하면서 보물은 계속 굴러들었습니다.
    내 남편이 얼마나 귀한 분인지도 알게 되고 우리 아이들이 얼마나
    사랑 덩어리인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먹지 않아도 배부르고 노래를 부르던 세계 여행에 대한 갈증도 
    사라졌습니다.
    ‘지금 이 순간’의 소중함이 짜릿하게 다가왔습니다. 
    행복한 투병 생활을 하는 내 앞에서 딸은 종종 
    사는 게 재미없단 말을 하곤 했었지요.
    안타까운 일이지만 똑똑하고 야망이 있는 아이니까 
    지나가는 감정의 바람이려니 했습니다. 
    외고 졸업, 외대 중퇴, 모델학과 졸업, 세계를 워킹 하겠다던
    딸은 우주로 떠나버렸습니다. 
    세계도 좁았던가 봅니다.
    새벽 두 시에 응급실로 달려가던 이 어미이게 걸려온 전화는
    “형님, 응급실로 오지 마시고 영안실로 오세요.”였습니다. 
    딸아, 사랑하는 내 딸아.
    남은 가족의 행복을 빌며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나간 내 딸아.
    너의 장례를 치르며 엄마를 걱정하던 아빠의 파란 얼굴을 보았니?
    아빠의 얼굴을 보는 순간 엄마는 네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오로지 아빠를 지켜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네가 사랑하고 존경했던 아빠,
    그 아빠를 지켜야 할 사람은 엄마뿐이잖아. 
    경미야!
    철없는 엄마를 번쩍 정신 차리게 해줘서 고마워.
    오늘은 활짝 웃는 네 사진을 식탁 앞에 붙였다.
    이제 널 바라보며 이런저런 애길 할 수 있을 것 같아.
    또 만나자.
    - 류부연 -
    
    
       
    출처 : 배밭골
    글쓴이 : 안영일 원글보기
    메모 :

    [사람의 길]한 선배의 49재, 바람처럼 산처럼

    2008 06/03   뉴스메이커 777호

    평생 일기를 쓰고 있다./재발된 암도 겁내지 않는다./자식보다 남편을 더 사랑한다./인생의 화두가 ‘재미’다./꽃과 나무만 보면 언제나 행복해진다./뒤늦게 자신의 매력을 알게 됐다./어떻게 살아야 만족스러울까 평생 고민했다./엄청난 욕심쟁이인 줄 나이 오십에 알았다./존경하는 엄마와 톱모델 딸이 있다./지혜로운 아들과 부처님 같은 남편이 있다./세계를 누비고 싶어 한다./마음공부로 날마다 지혜로워진다./생각은 허상이며 감옥임을 안다./섬세하고 아기자기하다./회갑 때 남편과 크루즈 여행을 할 거다. - 류부연 ‘류부연은’ 전문

    사람은 왜 아픈 것일까요. 왜 아파서 슬픈 것일까요.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합니다. 아무리 하찮은 벌레라도 아픔을 압니다. 절대자의 가해 앞에서 뭇생명들은 속절없이 아파합니다. 하지만 어찌하겠습니까. 부질없더라도 빛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만 숨은 것뿐이라고 믿기로 합시다. 그 숨은 빛 속에 숨은 뜻이 있다고 믿기로 합시다. 부디 살아내십시오. 살아내셔서 가슴에 묻은 그 빛을 다시 살려내십시오. 마침내 숨은 빛이 다시 드러나 시리도록 눈부실 때까지. 그것이 미약한 인간이 섭리의 세계를 이겨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졸고 ‘유성문의 길-숨은 빛’(뉴스메이커 2007. 12. 4일자) 중에서

    힘없는 인간의 바람은 항시 그렇게 어긋나는 법이다. 그 소망이 간절하면 간절할수록. 그것은 또한 세상을 착한 척 살아온 무위에 대한 당연한 업보다. 딸을 가슴에 묻고도 삶의 가녀린 끈을 놓지 않으려던 한 여자가 끝내 저 세상으로 갔다. 그녀가 지녔던 암보다 더 지독한 사랑마저 함께 품에 안고서. 그녀는 나의 선배다. 선배의 아내다.

    거기 내가 앉아 있다. 싹둑, 머리가 잘려나가고, 지난 기억마저 잘려나간다. 그대 누구인가. 물끄러미 한 얼굴을 바라본다. 참 고달팠구나. 살아온 날들이 아니라, 살아갈 날들 때문에. 몸을 누이면 잠이 쏟아지고, 꿈결에도 뭉툭, 머리가 잘려나간다. 베어다오. 치렁한 삶의 슬픔, 가없는 삶의 고단함, 자르고 잘라도, 다시 돋아나는 삶의 연민, 베어다오. 오래되고 낡아, 아무런 힘도 없으면서, 자라고 자라, 자꾸만 얽히어드는 삶의 기억, 삶의 슬픔, 부질없는 꿈까지도.
    - 졸고 ‘길, 만인보-옛날 이발소를 지나치다’(경향신문 2008. 4. 1일자) 중에서

    나는 만리동고개의 낡고 오래된 이발소를 거쳐 그녀가 누워 있는 병원 영안실로 갔다. 그 허름한 이발소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은 추억으로 따스했다. 나는 잠시 이발 의자에 몸을 누인 채 노련한 이발사에게 머리를 맡기고 싶었다. 비단 머리를 깎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고단한 몸을 잠시 쉬어가고 싶은 거였다. 하지만 나는 그냥 지나쳐 영안실의 파리한 불빛으로 나아갔다.

    부질없이 남은 자들, 막걸릿집으로 몰려가 쓸쓸히 잔을 기울였다. 누구는 이제 진정 백수가 되었노라고, 누구는 자식놈이 사시까지 패스했건만 여직 설움만 키워가고, 누구는 기어이 다시 총이라도 잡아야겠다고. 남은 자들, 아직 남은 날들로 들끓는데, 거기 도솔천을 건너는 이여, 그대 어디로 가시는가. 천상으로 가시려는가, 아수라 같은 인간사로 돌아오시려는가. 업의 술잔만 윤회처럼 돌고 도는 삼악도의 종재. - 졸고 ‘길, 만인보-어느 49재의 뒤풀이’(경향신문 2008. 5. 20일자) 중에서

    전주 정혜사에서 열린 49재, 그녀의 영가 앞에는 책 한 권이 놓였다. 류부연 지음, ‘바람처럼 자유롭게, 산처럼 담담하게’(바이북스). 생전에 그녀가 암과 싸우면서 틈틈이 적어놓은 일기와 편지, 시민기자로서 ‘오마이뉴스’에 게재했던 글들을 모은 책이다. 그 책의 활자들은 아직 온기가 채 식지 않은 듯도 했건만, 나는 그 책 앞에서 도무지 바람처럼 자유롭지도 산처럼 담담할 수도 없었다.

    마음을 돌려 세상을 바라보니 지금껏 보지 못했던 아름다운 세상이 보입니다. 내가 이렇게 소중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소중하니 가족들도 더 없이 소중합니다. 이웃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나를 사랑하는 일이며 삶은 사랑만 하기에도 짧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무시로 찾아오는 통증은 내게 온전한 삶을 선사하고 갑니다.

    그랬을까. 삶의 모든 고통조차도 그녀에게는 온통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이었을까. 톱모델을 꿈꾸던 딸아이가 불의의 화상사고를 입고 어미보다 먼저 세상을 버렸을 때도 과연 그러했을까.

    이건 사는 게 아니에요. 하루하루를 버티는 거예요. 언제 얼마나 좋아질지 모르는 이 상황을 버티며 사는 거예요. 엄마, 아빠… 6년이면… 저 많이 노력해 본거 아니에요? 그나마 모델로 일하면서, 무대 위에 서는 그 순간을 위해서 참고 견뎠지만… 이젠 못하겠어요.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엄마 아빠의 기쁨이 되지 못해서 너무 죄송해요. 오늘 2007 아시아 슈퍼모델대회를 TV에서 하더라고요. 살고 싶은 가장 큰 이유였는데… 내년에 꼭 한 번 더 도전해보고 싶었는데… 매일 해야 하는 샤워가 세상에서 제일 힘들고, 하루에 몇 번씩 가야 하는 화장실이 가장 가기 힘든 곳일 때… 하지만 아무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을 때 사는 게 어떨 것 같으세요? 이젠 정말 노력할 만큼 해봤어요. 아직도 해보고 싶은 게 많이 있지만 그 만큼 또 참아야 할 고통의 시간이 너무 끔찍해요.

    엄마 아빠의 딸로 태어나서 참 행복했어요. 승일아, 너의 누나로 살면서 참 감사했어. 누나 많이 도와줘서 고마워! 아무리 생각해도 자유로워지는 길은 이것밖에 없네요. 전 이제 고통에서 해방된다고 생각하니 무섭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시원해요. 그러니까 제발 저 때문에 슬퍼하지 마시고 행복하게 살아주세요. 사람에겐 다 어쩔 수 없는 사정들이 있게 마련이잖아요. 고등학교 때 엄마 말 듣고 더 저를 돌보아주었어야 되는 건데 바보같이… 엄마! 내년 4월 꼭 기적을 보여주셔야 해요! 제가 하늘나라에서 기도할게요. 마지막 쓰는 편진데 글씨 좀 예쁘게 쓰려 했더니 손이 자꾸만 떨려서 글씨가 밉다. ㅠ.ㅠ 엄마, 아빠, 승일이 모두 너무 사랑하고 고마워요. - 2007. 11. 2. 경미

    세상의 모든 어미는 기어이 자식보다 모질다. 그 모질고 모짐으로 스스로에게 또 가까운 사람들에게 덧없이 사랑의 상처를 입힌다. 그리고 기적은 없었다.

    딸아. 사랑하는 내 딸아. 남은 가족의 행복을 빌며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나간 내 딸아. 너의 장례를 치르며 엄마를 걱정하던 아빠의 파란 얼굴을 보았니? 아빠의 얼굴을 보는 순간 엄마는 네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오로지 아빠를 지켜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네가 사랑하고 존경했던 아빠, 그 아빠를 지켜야 할 사람은 엄마뿐이잖아. 경미야! 철없는 엄마를 번쩍 정신 차리게 해줘서 고마워. 오늘은 활짝 웃는 네 사진을 식탁 앞에 붙였다. 이제 널 바라보며 이런저런 애길 할 수 있을 것 같아. 또 만나자.

    오전 9시 반에 시작된 49재는 12시 반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길닦음 속에 영가가 돌고 죽은 이의 넋은 어디론가 천도되었다. 남은 사람들은 슬픔을 추스르고 다시 기운이라도 되찾으려는 양 절밥을 먹었다. 삶의 길이 바쁜 사람들이 다시 버스에 오를 때, 손녀에 이어 며느리마저 훠이 떠나보낸 시어머니는 일주문 앞에 기대 앉아 그 모습을 힘없이 바라보았다. 사람들 역시 길을 나서니 도무지 어디가 길이고 길이 아닌지 아득하기만 했다. 그 길의 끝에 집이 있을까.

    궁여지책으로 친정살이를 택했습니다. 남편의 묵묵부답으로 석 달은 혼자 애를 태워야 했지요. 귀국 후 6개월 만에 유방암은 폐에서 재발하였고 1년 정도 혼자 떠돌이 생활을 했습니다. 수도원에서 몇 달, 강원도 산 속에서 몇 달, 친구 별장에서 보름…. 친정어머니는 내가 공기 좋은 곳에 머물기를 바라셨기 때문에 내가 집에 오는 것을 불편해하셨습니다. 하지만 딱히 갈 곳이 없었고, 재발 후에 서둘러 분양받은 아파트 중도금이 들어가고 있는 상황이라 자금도 여유롭지 않았습니다.

    내 건강이 점점 나빠지자 남편은 빚이라도 내려고 했죠. 한사코 말렸습니다. 마음이 불편하니까요. 그러던 어느 날 숨이 쉬어지지 않아 공포 속에 어쩔 줄을 모르다가 더운 물로 샤워를 하게 되었는데 번개처럼 ‘집’이 스쳤습니다. 집이다. 집 때문에 내가 이 지경이 되었다. 쉬고 막힌 목소리로 친정어머니께 악을 썼습니다.

    “여기가 내 집이야. 왜 자꾸 나가라고 그래. 어디로 가란 말이야? 나도 나가고 싶어. 하지만 갈 곳이 없잖아. 나 숨도 못 쉬고 죽을 거 같아.”

    새 아파트는 내년 10월 입주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산 밑 조그만 월세 집으로 이사를 합니다. 부부만의 새 삶터로 가는 날 이삿짐 차는 오지 않습니다. 가볍게 살기로 했습니다.

    자꾸 잠이 옵니다. 맘이 편안한가 봅니다. 집은 사람을 살리는 곳이었습니다.

    삼가 명복을 빕니다.


    고(故) 류부연은 1957년 충북 영동에서 태어났다. 국민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인천 영종중학교, 부천 동중학교, 안산 관산중학교에서 15년간 교편을 잡았다. 가난하고 오지랖만 넓은 한 신문쟁이의 아내였고, 두 아이의 엄마였다. 2002년 유방암 수술을 받고 투병생활을 시작했다. 다행히 수술 경과는 좋았다. 2003년 미국 파견 발령을 받은 남편을 따라 미국 LA로 가 가족과 함께 1년 반 동안 체류했다. 귀국한 지 6개월 만에 급작스레 암이 재발했다. ‘오마이뉴스’에 시민기자로서 ‘유방암 환자의 유쾌한 하루’를 게재했다. 2007년 11월 슈퍼모델을 꿈꾸던 딸을 가슴에 묻었다. 2008년 3월 30일, 사랑하는 남편과 아들을 남겨둔 채 딸의 곁으로 갔다. 그렇게 보내기엔 너무도 아까운, 참 따뜻한 가슴을 지닌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