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뉴스

사랑을 넘지 못한 재능... 까미유 끌로델

klgallery 2007. 8. 26. 17:48

1884년의 모습.                                  

 

이름만으로도 슬픔이 느껴지는 여인... 까미유 끌로델.

그녀는 아름다운 미모와 일에 대한 열정과 자부심, 그리고 천부적인 재능

이 모든 것을 가지고도 철저히 실패하고 나락으로 떨어져 버린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비운의 예술가이다.

 

그녀는 1864년 프랑스 발뇌브에서 등기 소장이었던 아버지 Louise-Prosper Claudel과

어머니 Louise-Athenaise Cervaux 밑에서 1남2녀중 장녀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완고하고 폭력적이었기 때문에 가족과 항상 불화를 빚었으나

까미유만은 아버지 마음에 들었고 일찌기 그녀의 재능을 알아 본 그녀의 아버지는

노장 조각가인 Alfred Boucher에게 정식적인 조각 기초수업을 받게 하였다.

그녀가 17세 되던 해 아버지는 그녀를 파리로 보내 조각 공부를 시켰고

그녀를 위해 다른 가족까지 파리로 따라가기를 명하자 가족들의 분노는 극에 달하게 된다.

 

젊은 시절 로댕과 그의 부인 로즈             

 

파리에 도착한 그녀는 당시 여성들이 미술학교에 다닐 수 없었던 보수적인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사설 학원에 등록하고 다른 여류 조각가들과 작업실을 빌리는 등 의욕적으로 꿈을 펼쳐 나갔다.

그리고 1883년 스승이던 Boucher가 로마상을 받으러 이탈리아의 빌라 메디시로 떠나기 전

당대의 유명한 조각가인 그의 친구 로댕에게 까미유 지도를 부탁하게 되면서

당시 44세이던 로댕과 까미유와의 만남이 시작되었다.

이 후 10년간 까미유는 로댕의 견습생으로 일하면서 그와 연인으로 발전하게 된다.

하지만 그에게는 이미 로즈라는 부인이 있었고 그들의 관계는 비밀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까미유는 10년 동안 열심히 일했고 로댕에게는 가장 빛나는 문하생이었다.

로댕의 작품 중 가장 섬세한 작업은 까미유에게만 맡겼다고 하니

그에게 어느 정도 실력을 인정받고 있었던 셈이다.

또한 그녀는 로댕의 모델이 되어 수많은 작품의 포즈를 취해 주었다.

하지만 이러한 이들의 관계는 10년이라는 세월을 거치며 서서히 허물어져 가고 있었다.

 

까미유를 만날 당시 44세의 로댕과 25세 때의 까미유                 

 

1893년 그녀가 29세가 되자 자신의 삶을 다시 돌아 보게 된다.

벌써 5년 전 그들의 관계를 알게 된 어머니로 인해 집에서는 내쫓겼고

로댕과의 사랑은 자부심 강한 그녀가 인정할 수 없는 더러운 내연 관계에 불과했으며

로댕의 부인이었던 로즈는 끊임없이 그녀를 질투했다.

그리고 모든 열쇠를 쥐고 있었던 로댕은 자신의 첫 연인이었던 로즈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

또한 조각가로서의 재능은 아무리 노력해도 당대 최고의 조각가인 스승을 능가할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자신을 짓눌렀던 이 모든 것을 벗어 던지기로 마음 먹고 자신의 작업실을 구해 나오게 된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호락 호락 하지 않았다.

그 순간부터 그녀는 가난의 굴레에서 허덕거려야 했다.

모델이나 조수는 고사하고 조각을 하기 위한 재료 구입조차 어려웠다.

난방도 되지 않아 점토는 갈라져 나갔고 외투는 고사하고 구두 한 켤레 살 수도 없었다.

오로지 작품을 만들겠다는 일념 하나로 그녀는 작업을 계속해 나갔다.

이런 중에 작곡가 드뷔시를 만나 잠시 마음을 나누기도 하였지만

그녀 스스로 문을 닫고 다시 자기만의 세계 속으로 침잠해 버렸다.

 

그리고 그렇게 어렵게 세상에 내 놓은 작품들은

그저 '회반죽으로 빚어 놓은 거대한 석고 덩어리'라는 혹평 속에 계속 외면을 받았다.

몇 몇 비평가들은 그녀를 천재적인 조각가라 평했지만 오로지 소수 의견일 뿐이었고

그네들 조차 그녀의 급진성을 부담스러워 했다.

 

로댕은 그녀와 결별한 이후에도 대성공을 거두었고

그의 작품들은 파격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호평을 받았다.

심지어 그가 죽을 때까지 내놓은 작품들이

까미유와 함께 할 때 떠올렸던 테마로 구성되었다는 설도 있으니 까미유로서는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결국 그녀는 서서히 피해 망상증과 편집증에 시달리게 된다.

1905년에는 '으제니 블로'의 주선으로 그의 화랑에서 작품 13점 등을 전시했으나

로댕과의 사이가 멀어짐과 함께 세인들로 부터의 관심도 멀어져

그녀의 개인 전시회는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게 된다.

이에 정신적인 충격을 받은 그녀는 자신의 실패를 로댕에게 돌리면서

그가 자신의 아이디어를 모두 훔쳤고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믿어 작업실에 틀어 박히게 되었고

급기야 자신의 작품을 아무도 훔쳐 가지 못하게 스스로 망치로 부수게 된다.

그녀가 이렇게 비참하게 생활하는 것을 나머지 가족들은 잘 모르고 있었다.

아버지를 따라 중국 텐진으로 가서 생활하고 있었기 때문...

잠시 그녀를 만나러 왔던 남동생에 의해 이 사실이 알려지고 나서 아버지는 큰 충격을 받았고

이후 남동생과 아버지로부터 도움을 받아 생활을 연명해 나간다.

 

정신병원에서 1929년 찍은 사진. 왼쪽이 까미유 끌로델.      

 

그러던 중 1913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가족들은 그녀에게 아무도 아버지의 부고를 알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유일한 방패막이었던 아버지가 사후 일주일만에

가족들은 그녀를 정신병원에 감금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녀는 거기서 바깥으로 한 발자국도 나오지 못한 채 30년을 보내야만 했다...


로댕에 대한 편집증적인 증상은 죽는 날까지 그녀를 괴롭혔지만

그 증세만 제외하고는 별로 문제가 없었음에도 가족들은 그녀를 외면했다.

심지어 가족이나 친구가 있는 가까운 병원으로 옮기라는 원장의 제안도 묵살당했다.

그나마 그녀를 찾아 온 것은 남동생 이었지만

그 역시 어머니나 여동생 사후에도 까미유를 외면하고 풀어 주지 않았다.

아마도 보수적이었던 가족들은 그녀의 존재가 짐이었던것 같다.

그녀는 그렇게 외롭게 '나는 혼자다. 이렇게 끔찍한 형벌이 어디 있는가!' 탄식하며

1943년 외롭게 숨을 거두었고 그로부터 12년이 지난 후에야

상속인들이 그녀의 유골을 회수하러 왔지만 이미 그녀의 유골은 사라지고 없었다고 한다.

철저하게 세상에서 버림받고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녀의 1893년 작품 '성숙'               
노파의 손에 이끌려 가는 남자와 그에게 매달리는 여자의 모습               

 

1955년 로댕 박물관이 생기자 그녀의 남동생 폴은 자신이 보유했던 그녀의 작품을 선보였다.

"이 벌거벗은 여인이 바로 로댕에게 정신적, 육체적인 학대를 받은 우리 누이 카미유입니다.

무릎을 끓고 비굴하게 애원하는 모습이 그녀가 로댕에게 하고 싶었던 행동일겁니다."라고 회상하였다.

 

그나마 현대에 들어서면서 그녀의 조각들은 재조명 되었고 그녀의 재능은 인정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게 비참하게 살다간 그녀의 인생은 어떻게 보상받아야 하는 건지...

 

'나는 지옥에 떨어졌다. 나의 삶이었던 꿈으로부터...

 그러나 그것은 악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