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뉴스

트로이메라이, 꿈 길 속의 그녀... 클라라 슈만

klgallery 2007. 8. 26. 17:45

 

1810 6로베르트 슈만이 츠비카우에서 태어났다.

슈만의 아버지는 당시 서점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아들의 음악적 재능을 일찍 알아챘지만 그것을 키워 주지 못하고 1826년 일찍 세상을 뜬다.

그리고 그 즈음 당시 라이프치히에서 법률을 공부하던

대학생이 된 슈만이 한 여자 친구의 집에서

엄격한 피아노 교사였던 프리드리히 비크의 딸 클라라의 연주를 듣고

마음을 빼앗기게 된다.

그는 자기 안에 꿈틀거리던 음악에 대한 열정을 깨닫고

그의 제자이자 하숙생으로 들어가 연주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클라라 비크, 1819 9월에 태어난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천부적인 음악의 재능을 타고나서 어린 나이부터 공식 연주회 무대를 가진다.

괴테도 그녀의 찬미자일 만큼 이미 명성이 높은 소녀 연주가였다.

슈만이 프리드리히 밑에서 음악을 공부하면서 이들은 남매와 같은 우정을 쌓기 시작한다.

그러다 슈만의 손가락 하나가 마비가 된다. 연주가로서 그의 인생은 끝난 셈

하지만 작곡가로 그의 길을 돌려 계속 음악의 길을 걷는다.

그는 1834년 에르네스티네 폰 프리켄이라는 소녀와 약혼을 하지만

클라라가 1935년 오랜 연주회에서 돌아오자 자신이 클라라를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슈만은 용기를 내어 약혼을 파기하고 그녀에게 청혼한다.

하지만 그녀의 아버지이자 슈만의 선생인 프리드리히는 이들의 관계를 인정하지 않는다. 음악가로서 이루지 못한 자신의 꿈을 이루어 나가고 있는 클라라를

보잘 것 없는 음악도에게 내어 주기를 거부한 것이다.

아버지의 반대 속에 애만 태우던 두 사람 

 

1837년 열린 한 연주회의 프로그램에 그녀가

자신의 곡 교향연습곡 op.13’을 넣어 연주하는 것을 본 슈만은

그녀 역시 자신을 사랑하고 있음을 확신한다.

하지만 클라라 아버지의 계속된 반대에 두 사람은 지쳐 갔고

 결국 클라라가 약혼을 파기하자는 제안을 하기에 이른다.

이에 슈만은 심한 우울증에 빠지고 자살을 생각할 만큼 괴로워했다고 한다.

결국 아버지에 맞서 두 사람은 재판을 통해 결혼 허가증을 받아

1840년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이 해가 슈만에게는 창작의 절정기로 무려 130개가 넘는 곡들이 이 때 씌여 졌다.

 

 

하지만 두 사람의 음악가가 한 집에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집에 피아노가 한 대 뿐이어서 슈만이 미친 듯 작업에 열중하면

클라라는 연습조차 할 수 없었고

슈만이 평화로운 가정생활을 원한 반면

클라라는 연주가로서 자신의 삶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이때는 오히려 클라라의 명성이 더 높은 상태.

심지어 1844년 함께 한 모스크바 연주 여행에서

사람들은 슈만도 음악가냐며 묻기도 했다고 한다.

 

1850년 어렵게 얻은 뒤셀도르프 음악감독 직도

곧 나타나기 시작한 정신병으로 그만 둔 슈만은

다행히 새 친구를 얻어 경과가 조금 좋아지기 시작한다.

20대 초반이었던 요하네스 브람스와 바이올린 연주자 요제프 오아힘이 바로 그들

특히 브람스의 연주를 듣고 브람스의 천재성을 알아본 슈만은

곧바로 '음악신보'에 브람스를 극찬하는 글을 올렸고

한달 동안이나 자신들의 집에 머무르게 했다

 

  클라라(좌)와 브람스(우)

 

1853년 그의 상태가 나아지면서 클라라는

자신의 생일에 새 피아노를 선물받고 다시 한 번 행복한 시간을 만끽한다.

하지만 그 시간은 오래 가지 않는다. 슈만의 정신병이 다시 심해지고 있었던 것

슈만은 제어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클라라에게 자신이 발작하면 상처받지 않도록 자신을 멀리하라고 요청한다.

어느 날 발작으로 라인강에 뛰어든 그는 구조되자 자발적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이 소식을 들은 브람스는 당장 클라라에게 달려간다.

당시 클라라는 여섯명의 아이의 어머니였고 일곱 번째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

브람스는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피아노 3중주곡 제 1'을 들려주고,

막내가 태어나자 그녀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슈만이 클라라에게 헌정했던 곡의 주제를 이용한

'슈만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을 작곡하기도 했다.

또 경제적 도움을 주기 위해 클라라와 같이 연주회를 기획하기도 했다.

이처럼 그녀의 슬픔을 달래고 공감을 나누는 동안

브람스의 가슴 속에는 예기치 못한 감정이 싹트기 시작으니...

클라라를 사모하는 마음이 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클라라는 스승의 부인... 그는 자신의 감정을 애써 억누른다.

 

그리고 1856 7월... 그렇게 슈만이 세상을 떠난다.

클라라는 남편과 마지막 재회 후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그는 나를 보고 미소를 지으면서 몹시 힘들게 나를 품에 안았다.
나는 이 포옹을 온갖 보물을 준다 해도 바꾸지 않을 것이다.

 

슈만의 죽음 이후 클라라는 계속해서 연주가로서 활동한다.

그리고 브람스그는 마음 속에 클라라를 간직하고 창작에 몰두한다.

그는 남편을 잃고 슬픔 속에 빠진 클라라를 위로하기 위해

'남아있는 자를 위한 레퀴엠'(독일 레퀴엠) 작곡했다.

그렇게 자신의 감정을 숨겨둔 채 그는 그녀를 좋은 친구로 대한다.

40년 후 클라라가 뇌졸중으로 쓰러졌다는 소식을 접할 때 까지...

그녀의 소식을 들은 브람스는 죽음의 예감을 느끼고

죽음에 대한 명상을 다룬 성경말씀에 의한

' 개의 엄숙한 노래' 쓰기 시작, 그의 63번째 생일에 완성했다.

곡에는 사랑하는 그녀에 대한 배려와 자신의 생애의 마지막에 대한 예측을

인생의 무상함과 사랑의 위대함과 함께 실었다.

클라라의 죽음 그로부터 13 후였다.

 

1896 520 클라라가 77세의 나이로 타계했을 브람스는

"나의 삶의 가장 아름다운 체험이요 가장 위대한 자신이며

가장 고귀한 의미를 상실했다."고 말하며 그녀의 죽음을 아파했다.

그리고 이듬해 4 3. 64세의 일기로 그도 그녀의 뒤를 서둘러 따라가고 말았다.

평생을 지켜만 봤던 안타깝고도 아름다운 사랑이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