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

[스크랩] 앵두꽃은 바람에 날리고

klgallery 2006. 6. 15. 17:46

 

 

 

♧ 찬바람에 몸을 맡기고

 

 

 꽃의 성질도 사람의 성질 못지 않게 다양하고 개성적이라는 것이 몇 년 동안 꽃을 쫓아다닌 소감이다. 아직 꽤나 아름다운 모습과 상당한 영양분이 남아 있는데도, 때가 되면 과감하게 몸을 던져버리는 동백 같은 꽃이 있는가 하면, 어린 열매에 자신의 영양가를 다 털어 주고 나서도 누가 건드리지 않으면 열매가 익어 자신의 몸이 말라 사그라질 때까지 견디는 장미 같은 꽃도 있다. 

 

 앵두꽃은 다섯 장의 꽃잎으로 잠시 치장해 벌을 불러들인 다음, 바람이 불어오면 몸을 사리지 않고 몸을 맡겨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는다. 자신의 할 일만 하면 열매를 맺히고 그것을 익힐 나무에게는 더 이상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태도다. 자식들을 다 키워 짝을 다 정해주고 제 갈 길로 다 떠나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서도 신의 섭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린다. 물론 사람과 꽃이 비교의 대상이 될지는 의문스럽지만.

 

 

 

 어릴 적 우리집 울타리 안에는 복숭아나무는 없었지만, 당시 조그만 키로는 다 따먹지 못하고 올라가야 따먹을 수 있는 제법 큰 앵두나무가 있었다. 어린 시절에 그 앙증맞고 새빨갛게 익어 윤기가 흐르는 그 열매는 나를 매혹시키기에 충분했고, 곧잘 내 동시의 소재로 등장했다. 부끄러워 얼굴 빨개진 소녀의 얼굴로 많이 비유되었다.

 

 우리 학교는 중산간 지대 과수원 가운데 위치해 있다. 오늘 아침 모처럼 시간이 나길래 할머니가 애써 가꾸시는 밭을 바라보니, 이 앵두꽃이 확 눈에 들어와 앵두 서리하는 마음으로 살금살금 넘어 들어가 보았더니, 지난밤의 찬 기운과 바람에 많이 떨어져 버리고 남아 있는 꽃도 많이 상했다. '아무려면 어떨까? 원래의 모습이 이건데….' 하고 찍고 보니 바람에 많이 흔들렸다.   


 

 

 

 

 

♧ 꽃 핀 나무 / 이기철


하루를 침대에 눕히기 위해서는
한 사람이 그리움을 내려놓아야 한다
한 사람의 마음이 꽃 핀 나무로 서기 위해서는
한 움큼의 기쁨을 그의 마음 속에 심어야 한다
지나오면 모두 어제가 되고 작년이 되는
이빨 속에 무참히 뜯긴 시간들
봄을 따라가던 맹목의 가을이
잘못 든 길에서 얼굴 붉힌다
그것이 세월이다
그러나 한 다발의 기쁨으로 세월을 견디기 위해서는
쓸쓸함의 계단을 딛고 올라
꽃 핀 나무의 열렬함으로 하루를
꼿꼿이 세워야 한다
내가 사랑했던 나무와 네가 사랑했던 나무의
빛깔이 서로 다를 때
그것이 한 해다
세상은 어두워도 꽃 핀 나무의 마음은
혼자 환하다

 

                                   -「문학사상」(2000.4)

 

출처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글쓴이 : 김창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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