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이로운 女性,
화가 조지아 오키프의 생애
(이 사진은 미국의 사진역사와 예술작품 경매 역사에 하나의
경이로운 기록을 세운 작품이다.)
조지아 오키프는 1887년 11월 15일, 미국 위스콘신주 선프레리(Sun Prairie) 근처의 한 농장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부모는 혁명으로 몰락한 헝가리 귀족과 대기근을 피해 미국으로 이민을 온
아일랜드계 농민의 딸이었다. Alfred Stieglitz의 1918년 작품 스티글리츠가 찍은 그의 연인, 오키프의 사진
1904년 시카고 미술학교, 1907년 뉴욕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서 공부했고, 잠시 동안 상업미술 활동을 하기도 했다. 그녀는 학교를 졸업한 뒤 1913년부터 1918년까지 텍사스 등의 학교와 대학에서 미술을 가르쳤다. 어쩌면 이때까지 그녀의 인생은 미술을 공부한 대개의 평범한 여성들이 밟아가는 그런 과정이었는지 모른다.
그녀의 인생은 1916년 사진작가인 알프레드 스티글리츠(Alfred Stieglitz, 미국의 사진작가, 1864~1946)를 만나면서 새롭게 시작되었다. 이때 그녀의 나이가 불과 28세 무렵이었고, 스티글리츠는 52세였다.
1916년 스티글리츠는 오키프의 작품을 보았다. 뉴욕에 온 그녀는 무명의 예술가였다.
스티글리츠는 그녀의 그림에 놀라고 있었다. 그들은 1918년부터 연인이 되었고 1924년 결혼했다. 스티글리츠가 Alfred Stieglitz의 1918년 작품 머물고 있던 뉴멕시코 등지에서 누드를 비롯 초상사진으로 그녀의 일상적인 삶을 기록하였다. 오키프의 누드사진들로 말미암아 그녀의 전시에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그녀는 스티글리츠를 만난후, 가장 화제의 중심에 있는 화가가 되었다. 아마도 오키프의 예술혼과 미학 세계에 진정한 미술적 심미안이 눈떠서. 미국 미술사에 가장 강력한 추상미술의 대가로서의 삶이 이로부터 시작 되었는지 모른다. 그들은 결혼후 성의 자유를 주창하며 새로운 결혼관을 확립했다.
136만달러에 판매돼 가장 비싼 사진 작품 2, 3위를 차지했다. Alfred Stieglitz의 1918년 작품 '<알프레드가 날 찍기 시작한 것은 내가 스물 여섯살 okeefe | 1931 - Hernandez New Mexico -조지아 오키프가 거주하던 뉴멕시코의 집 Georgia O'Keeffe in Abiquiu, New Mexico, 후앙 해밀턴(Juan Hamilton)에게 유산으로 남긴 것이다. 후일 해밀턴의 부인인 안나 마리는 그녀의 수집품과 책, 옷 등 유품을 미술관에 기증했다. okeefe | 1928 - Two Calla Lillies on Pink 그녀는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와 결혼한 뒤에도 남편의 성(姓)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결혼전 성을 그대로 사용했고, 서유럽계의 모더니즘과 직접적 관계가 없는 추상환상주의의 이미지를 개발하여 20세기 미국 미술계에서 독보적 위치를 차지했다. 뮤지엄 오브 파인 아트(the Museum of Fine Arts)의 20 갤러리(the 20 galleries)에서 전시되고 있는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e)의 "파피(Poppy)" 중서부 플로리다 Pinellas County
'마침내 여자도 그림을 그릴 줄 알게 되었군'이라고 말했다.
그의 문화 확산 전시장이며 카페인 291화랑에서 전시를 해 주었다.
스티글리츠가 이름도 낯선 이 여인의 작품들을 '291화랑'의 가장 좋은 장소에 전시한 것은 어쩌면 모험이었지만 이 모험은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오키프는 당장 그에게 달려가 자신의 그림들을 떼어줄 것을 요구했지만 스티글리츠는 연약한 몸매로 자신의 의사를 명확하게 밝히며 항의하는 그녀에게서 묘한 매력을 느꼈다.
그는오히려 그녀를 설득하여 그림을 계속하여 전시하도록 한다.
세계적 거장들의 작품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그녀의 그림은 독특한
매력을 발산했고,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으며 화단의 주목을 받게
되기에 이른다. 결국 스티글리츠에 의해 평단에 소개된 그녀는 이후
생애의 전환점을 이루어 미국의 가장 위대한 화가 중 한 사람으로
명성을 얻게 된다.
스티글리츠는 '사진은 예술을 모방할게 아니라 당당히 예술을 파먹고 살아야한다' 며 스트레이트 포토(Straight Photography)와 사진분리파 운동을 주장하며 당대 사진계의 거장으로 떠오른 인물이었다. 또한 그는 1905년부터 뉴욕에 '291갤러리'를 열고 유럽의 선진적인
거장들 - 파블로 피카소, 폴 세잔느 등 - 의 작품을 미국에 소개하고 있었다.
Alfred Stieglitz의 1918년 작품
51살 오키프가 28세였다. 스티글리츠는 오키프와의 결혼을 위하여
부인과 이혼을 하였다. 오키프는 비슷한 나이의 남자친구와 결별했다.
스티글리츠는 오키프의 전신 사진을 수만장을 찍었고, 세상에
작품으로 발표한 것만도 500장이 넘는다고 한다.
스티글리츠는 자신의 부인이자 미국의 대표적 표현주의 화가인 조지아 오키프를 1920년대부터 사진에 담았다. 그는 오키프를 집이나 스튜디오 그리고 그녀가
사진은 이전에 유행하던 초상화만 몰아낸 것이 아니라
여성의 육체를 묘사하던 누드화와 성애(性愛)화의 몰락을 가져왔다.
스티글리츠는 오키프와 예술혼을 불태우는 속에서 작품을 만들었고, 그런 두 사람의 관계는 때때로 작품 속에 고스란히 반영되고 있다.
스티글리츠는 그녀의 작품들이 지니고 있는 세계 중 특히, <꽃> 시리즈에서 느낄 수 있는 섬세함, 예리함과 동일한 느낌을 자아내도록 사진 랜즈에 담았다.
각자 혼외정사를 즐겼고 오키프는 양성애적 성향을 보였다고 한다.
FBI 보고서에는 그녀가 극도의 자유주의적인 위험인물로 기록 되어있다.
1927년 스티글리츠는 도로시 노먼이라는 자기보다 40세나 어린
갑부인 유부녀와 바람을 피우기 시작하여 푹 빠져 있었다.
오키프는 설상가상으로 남동생이 죽고, '대공황기에 화려하기 짝이
없는 꽃그림이 뭐냐'는 비평가들의 질타에 시달렸다.
그녀는 가슴에 생긴 종양을 제거하고,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할 만큼
힘든 세월을 보냈다.
그리고 45년 뉴멕시코주 산호제 아비큐로 홀로 이주해 그림에만
몰두하며 지냈다. 이듬해 남편 스티글리츠가 숨지자, 오키프는
남편의 유골을 시골집 호숫가에 묻었다. 연적 도로시와 시댁
식구들께는 끝내 그 장소를 알려주지 않았다고 한다.
(Georgia O''Keeffe)의 손 사진과 누드 사진(1919)이 소더비 경매에서 각각 147만2천달러와
90세가 넘어선 조지아 오키프는 스티글리츠가 그녀의
포트레이트 작업들을 하던 당시를 회상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도였을 때부터였다. 내 사진을 그의 사진전에 처음으로 전시한 것은 앤더슨 갤러리에서였는데, 여러 사람들이 전시된 사진들을 돌아보고 나서 그에게 부탁하기를 그가 날 찍은 것처럼 자신들의 아내나 여자 친구를 찍어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알프레드는 하도 우스워서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 사람들은 알프레드가 그들의 아내나 여자 친구들 사진을 날 찍듯이 찍으려면 얼마나 가까운 관계가 되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아마도 그런 사실들을 알았더라면 아무도 그에게 그런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1946년 인생과 예술의 동반자였던 스티글리츠가 죽자 조지아 오키프는 뉴멕시코의 사막으로 떠나 은둔 생활을 시작한다.
뉴멕시코의 황량한 사막은 그녀가 1917년 기차 여행 중
우연히 발견한 곳으로 그녀는 이 곳의 풍경에 단번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후 1929년부터 여름을 뉴멕시코에서 나기 시작했고 1949년에는 아예 이곳에 정착하여 1986년 산타페에서 숨질 때까지 '애비큐(Abiquiu)'의 집과 ‘고스트 랜치’ 목장을 오가며 작품 활동에 전념했다.
조지아 오키프는 이 곳 뉴멕시코의 사막에서 수집한 많은 물건들을 자기 작품에 즐겨 묘사하곤 했는데 그 중에서도 뉴 멕시코의 특이한 바위들과 햇빛에 말끔히 육탈(肉脫)된 동물의 뼈·해골·뿔 등은 그녀가 특히 사랑한 풍경의 일부분이었다. 그는 애비큐와 고스트 랜치 목장의 저택을 이런 ‘예술품’들로 장식했고, 계속해서 이들을 자신의 작품에 등장시켰다.
이런 수집품들은 오키프의 정신세계와 작품세계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오키프는 무엇이건 간에 버리는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녀의 집안은 항상 잡동사니로 가득차 있었는데, 오키프는 이들을 각기 모양과 색깔 등에 따라 분류하고 정리했다.
그녀는 전화는 물론 전기와 수도 시설조차 없는 문명의 변경에 스스로를 유폐시켰다. 조지아 오키프는 어떤 특별한 정치적 몸짓이나 페미니즘적인 행동을 두드러지게 한 적은 없다. 또한 그녀에 대한 평가 역시 앞서 이야기했던 스티글리츠와의 관계에 묻혀 뒷전이 되거나 그녀의 그림에 대한 성적인 선입견들로 인해 왜곡되곤 했다. 그런 이유로 조지아 오키프는 화가로서보다는 여성으로 더 많은 관심을
끌었다.
조지아 오키프의 1950년,
뉴멕시코의 산타페에서의 말년 사진,
photographed by Carl Van Vechten, 1950.
나이가 든 오키프의 곁에는 젊은 남자인 후앙 해밀턴이 있었다. 오키프는 자신이 85세에 만난 26세의 존 해밀턴에 대해 스스로 연인이라고 생각했고 해밀턴이 다른 여자에게 눈을 돌렸지만 모든 재산을 비서인 그에게 상속해 주었다.
오키프에게는 자녀가 없었다.
간혹 그녀의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들이 가십처럼 이야기되고는 했다. 그 중 하나가 자신의 작품에 사인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왜 작품에 사인을 남기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녀는 자신의 얼굴에도 사인을 하느냐고 반문하곤 했다.
그녀는 자신의 죽음에 이르러서도(1986년) 다시 한 번 세간의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자신이 평생에 걸쳐 작업한 모든 작품들과 재산을 자신의 조수이자 친구였던
그녀 이전의 많은 여성 화가들이 이름을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던 점을 고려해볼 때 조지아 오키프가 자신의 작품에 사인을 남기지 않으려 했던 것은 이에 대한 반항은 아니었을까? 오키프는 꽃을 즐겨 그렸는데 많은 비평가들이 이들 사이에서 여성과의 생물학적 연관성을 찾으려고 했다.
이 여성화가는 다음과 같이 되묻는다.
"사람들은 왜 풍경화에서 사물들을 실제보다 작게 그리느냐고 묻지는 않으면서, 나에게는 꽃을 실제보다 크게 그리는 것에 대하여 질문을 하는가?
Were I to paint the same flower so small, no one would look at them... So I thought I'll make them big like the huge buildings going up. People will be startled; they'll have to look at them and they did."
오키프는 자연의 원만한 선과 윤곽, 화려한 색채를 통해 자연으로 치환되는
“나는 내가 원하는 곳에서 살 수 없고, 원하는 곳에 갈 수 없고, 원하는 것을 할 수 없다. 심지어 내가 원하는 것을 말할 수도 없다. 학교와 교사 화가들로부터 배운 것은 내가 원하는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했다. … 결국 나는 타인은 신경 안 쓰기로 했다. 나 자신에게 진짜 중요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 나의 그림을 그렸다.”
참고 출처 :'조지아 오키프 그리고 스티글리츠' 민음사,
바람구두연방의 문화 망명지.
동양 양귀비꽃 (1928)
조지아 오키프 Georgia O'Keeffe (1887~1986) 작
조지아 오키프의 꽃그림은 꽃그림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온화함이나 귀여움과는 거리가 멀다. 극단적으로 클로즈업되고 확대된 꽃들은 오히려 무시무시할 만큼 압도적이어서 그림을 보면 한 발짝 뒤로 물러서게 될 정도다! 하지만 다음 순간에는 확대된 꽃이 보여주는, 미처 몰랐던 낯선 형태와 색채 톤의 기이한 아름다움에 빨려들어가, 물끄러미 응시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오키프의 꽃그림은 꽃의 통념적 이미지나 문화사적 의미에서 벗어나서, 오로지 그 숨겨진 형태미와 색채 톤의 어울림을 새로운 소우주로 재현하기 때문에 추상화에 가깝다. 그래서 그녀는 추상미술의 독보적인 개척가로 불리기도 한다.
오키프의 꽃 연작 중에서도 특히 강렬하고 매혹적인 것이 양귀비꽃 그림들인데, 가운데 검은 부분에서 붉은 꽃잎이 뻗어나가 넘실거리는 것을 보고 있으면... 거대한 폭발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태양의 흑점과 홍염을 보는 것 같기도 해서, 약동하는 에너지를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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