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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이해인의 가을 편지와 배풍등

klgallery 2009. 11. 23. 15:54

 

 

♧ 가을 편지 - 이해인               


1

 

당신이 내게 주신 가을 노트의 흰 페이지마다 나는 서투

른 글씨의 노래들을 채워 넣습니다. 글씨는 어느새 들꽃

으로 피어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2

 

말은 없어지고 눈빛만 노을로 타는 우리들의 가을, 가는

곳마다에서 나는 당신의 눈빛과 마주칩니다. 가을마다 당

신은 저녁노을로 오십니다.


3

 

말은 없어지고 목소리만 살아남는 우리들의 가을, 가는

곳마다에서 나는 당신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그 목소리

에 목숨을 걸고 사는 나의 푸른 목소리로 나는 오늘도

당신을 부릅니다.


 

4

 

가을의 그윽한 이마 위에 입맞춤하는 햇살, 햇살을 받아

익은 연한 햇과일처럼 당신의 나무에서 내가 열리는 날

을 잠시 헤아려 보는 가을 아침입니다. 가을처럼 서늘한

당신의 모습이 가을 산천에 어립니다. 나도 당신을 닮아

서늘한 눈빛으로 살고 싶습니다.


5

 

싱싱한 마음으로 사과를 사러 갔었습니다. 사과 씨만한

일상의 기쁨들이 가슴 속에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무심히

지나치는 나의 이웃들과도 정다운 인사를 나누고 싶었습

니다.


6

 

기쁠 때엔 너무 드러나지 않게 감탄사를 아껴 둡니다. 슬

플 때엔 너무 드러나지 않게 눈물을 아껴 둡니다. 이 가

을엔 나의 마음 길들이며 모든 걸 참아 냅니다. 나에 도

취하여 당신을 잃는 일이 없기 위하여….


 

7

 

길을 가다 노랗게 물든 나뭇잎을 주웠습니다. 크나큰 축

복의 가을을 조그만 크기로 접어 당신께 보내고 싶습니

다. 당신 앞엔 늘 작은 모습으로 머무는 나를 그래도 어

여삐 여기시는 당신.


8

 

빛바랜 시집, 책갈피에 숨어 있던 20 년 전의 단풍잎에

도 내가 살아 온 가을이 빛나고 있습니다. 친구의 글씨

가 추억으로 찍혀 있는 한 장의 단풍잎에서 붉은 피 흐르

는 당신의 손을 봅니다. 파열된 심장처럼 아프디아픈 그

사랑을 내가 읽습니다.


9

 

당신을 기억할 때마다 내 마음은 불붙는 단풍숲, 누구도

끌 수 없는 불의 숲입니다. 당신이 그리울 때마다 내 마

음은 열리는 가을하늘, 그 누구도 닫지 못하는 푸른 하

늘입니다.


 

10

 

하찮은 일에도 왠지 가슴이 뛰는 가을. 나는 당신 앞에

늘 소심증(小心症) 환자(患者)입니다. 내 모든 잘못을

고백하고 나서도 죄는 여전히 크게 남아 있고, 내 모든

사랑을 고백하고 나서도 사랑은 여전히 너무 많이 남아

있는 것… 이것이 때로는 기쁘고 때로는 초조합니다.


11

 

뜰에는 한 잎 두 잎 낙엽이 쌓이고 내 마음엔 한 잎 두

잎 시(詩)가 쌓입니다. 가을이 내민 단풍 빛의 편지지에

타서 익은 말들을 적지 않아도 당신이 나를 읽으시는 고

요한 저녁, 내 영혼의 촉수 높여 빈방을 밝힙니다.


12

 

나무가 미련 없이 잎을 버리듯 더 자유스럽게, 더 홀가분

하게 그리고 더 자연스럽게 살고 싶습니다. 하나의 높은

산에 이르기 위해서는 여러 개의 낮은 언덕도 넘어야 하

고, 하나의 큰 바다에 이르기 위해서는 여러 개의 작은

강도 건너야 함을 깨우쳐주셨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삶

의 깊이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하찮고 짜증스럽기조차 한

일상(日常)의 일들을 최선의 노력으로 견디어 내야 한다

는 것을.


 

13

 

바람이 붑니다. 당신을 기억하는 내 고뇌의 분량만큼 보

이지 않게 보이지 않게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14

 

숲속에 앉아 해를 받고 떨어지는 나뭇잎들의 기도를 들

은 적이 있습니까. 한 나무에서 떨어지는 나뭇잎들의 서

로 다른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까. 이승에 뿌리내린

삶의 나무에서 지는 잎처럼 하나씩 사람들이 떨어져 나

갈 때 아무도 그의 혼이 태우는 마지막 기도를 들을 수

없어 안타까워해 본 적이 있습니까. 지는 잎처럼 그의 삶

이 또한 잊혀져 갈 것을 ‘당연한 슬픔’으로 받아들이지

못해 괴로워해 본 적이 있습니까.


15

 

은행잎이 지고 있어요. 노란 꽃비처럼, 나비처럼 춤을 추

는 무도회. 이 순간을 마지막인 듯이 당신을 사랑한 나

의 언어처럼 쏟아지는 빗소리… 마지막으로 아껴 두

었던 이별의 인사처럼 지금은 잎이 지고 있어요. 그토록

눈부시던 당신과 나이 황금빛 추억들이 울면서 웃으면서

떨어지고 있어요. 아프도록 찬란했던 당신과 나의 시간

들이 또다시 사랑으로 지고 있어요.


 

16

 

당신은 늘 나를 용서하는 어진 바다입니다. 내 모든 죄를

파도로 밀어내며 온몸으로 나를 부르는 바다. 나도 당신

처럼 넓혀 주십시오. 나의 모든 삶이 당신에게 업혀가게

하십시오.


17

 

당신은 늘 나를 무릎에 앉히는 너그러운 산, 내 모든 잘

못을 사랑으로 덮으며 오늘도 나를 위해 낮게 내려앉는

산. 나를 당신께 드립니다. 나도 당신처럼 높여 주십시오.


18

 

당신은 내 생(生)에 그러진 가장 정직한 하나의 선(線).

그리고 내 생(生)에 찍혀진 가장 완벽한 한개의 점(點).

오직 당신을 위하여 살게 하십시오.


 

19

 

당신이 안 보이는 날. 울지 않으려고 올려다 본 하늘 위

에 착한 새 한 마리 날고 있었습니다. 당신을 향한 내

무언(無言)의 높고 재빠른 그 나래짓처럼.


20

 

당신은 내 안에 깊은 우물 하나 파 놓으시고 물은 거저

주시지 않습니다. 찾아야 주십니다. 당신이 아니고는 채

울 수 없는 갈증. 당신은 마셔도 마셔도 끝이 없는 샘,

돌아 서면 즉시 목이 마른 샘…  당신 앞엔 목마르지

않은 날 하루도 없습니다.


21

 

이 가을엔 안팎으로 많은 것을 떠나보냈습니다. 원해서

가진 가난한 마음 후회롭지 않도록 나는 산새처럼 기도

합니다. 시(詩)도 못쓰고 나뭇잎만 주워도 풍요로운 가

을날, 초승달에서 차오르던 내 사랑의 보름달도 어느새

다시 그믐달이 되었습니다.

 

 

22

 

바다 위에 우뚝 솟은 섬은 변함이 없고 내 마음 위에 우

뚝 솟은 사랑도 변함이 없습니다. 사랑은 밝은 귀, 귀가

밝아서 내가 하는 모든 말 죄다 엿듣고 있습니다. 사랑은

밝은 눈, 눈이 밝아서 내 속마음 하나도 놓치지 않고 모

조리 읽어 냅니다. 사람은 늙어 가도 늙지 않는 사랑. 세

월은 떠나가도 갈 줄 모르는 사랑. 나는 그를 절대로 숨

길 수가 없습니다.


23

 

잊혀진 언어들이 어둠 속에 깨어나 손 흔들며 옵니다. 국

화빛 새 옷 입고, 석류알 웃음 물고 가까이 옵니다, 그

들과 함께 나는 밤새 화려한 시를 쓰고 싶습니다. 찔레

열매를 닮은 기쁨들이 가슴 속에 매달립니다. 풀벌레가

쏟아 버린 가을 울음도 오늘은 쓸쓸할 틈이 없습니다.


24

 

당신이 축복해 주신 목숨이 왜 이다지 배고픕니까. 내게

모든 걸 주셨지만 받을수록 목마릅니다. 당신에게 모든

걸 드렸지만 드릴수록 허전합니다. 언제 어디에서 끝이

나겠습니까.

 

 

25

 

당신과의 거리를 다시 확인하는 아침 미사에서 나팔꽃으

로 피워 올리는 나의 기도. ‘나의 사랑이 티 없이 단순하

게 하십시오. 풀숲에 앉은 민들레 한 송이처럼 숨어 피

게 하십시오.‘


26

 

오늘은 모차르트 곡을 들으며 잠들고 싶습니다. 몰래 숨

어 들어온 감기 기운 같은 영원에의 그리움을 휘감고 쓸

쓸함조차 실컷 맛들이고 싶습니다. 당신 아닌 그 누군가

에게 기대를 걸었던 나의 어리석음도 뉘우치면서 당신 안

에 평온히 쉬고 싶습니다.


27

 

엄마를 만났다 헤어질 때처럼 눈물이 핑 돌아도 서운하

지 않은 가을날. 살아 있음이 더욱 고맙고 슬픈 일이 생

겨도 그저 은혜로운 가을날. 홀로 떠나기 위해 홀로 사

는 목숨 또한 아름다운 것임을 기억하게 하소서.

 

 

28

 

가을이 저물까 두렵습니다. 가을에 온 당신이 나를 떠날

까 두렵습니다. 가을엔 아픔도 아름다운 것. 근심으로 얼

굴이 핼쑥해져도 당신 앞엔 늘 행복합니다. 걸을 수 있는

데도 업혀가길 원했던 나. 아이처럼 철없는 나의 행동을

오히려 어여삐 여기시던 당신… 한 켤레의 고독을 신

고 정갈한 마음으로 들길을 걷게 하여 주십시오.


29

 

잃은 단어 하나를 찾아 헤매다 병이 나 버리는 나의 마

음을 창밖의 귀뚜라미는 알아줍니다. 사람들이 싫어서

는 아닌데도 조그만 벌레 한 마리에서 더 큰 위로를 받

을 때도 있음을 당신은 아십니다.


30

 

여기 제가 왔습니다. 언제나 사랑의 원정(園丁)인 당신.

당신이 익히신 저 눈부신 열매들을 어서 먹게 해 주십시

오. 가을 하늘처럼 높고 깊은 사랑의 비법(秘法)을 들려

주십시오. 당신을 부르는 내 마음이 이 가을엔 좀 더 겸허

하게 하십시오.

 

 

 

출처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글쓴이 : 김창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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