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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 누구도 존중받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것이 제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주목한 이유입니다. 그들을 위한 ‘우선적 사랑’에서 더 나아가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사랑’으로 가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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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믿음 때문에 추기경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그를 만나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시간을 베풀었다. 그를 만나고 싶어 하는 이들은 많았지만, 추기경이 우선순위를 둔 이들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었다. ‘교회는 가난한 이들의 눈물을 닦아 주어야 한다’는 믿음에서였다. 서울대교구장의 바쁜 일정 가운데도 해마다 성탄 전야에는 소외된 이들을 찾아가 성탄 미사를 함께 드리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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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동 철거민촌 ‘복음자리’ 성탄성야미사 후(1977. 12. 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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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민주화운동의 편에 선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지학순 주교가 구속되기까지 한 1974년 민청학련 사건, 1978년 동일방직노조 사건 등 김 추기경은 성탄·사순 메시지나 강연, 시국담화문 등을 통해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짚어내는 일에 앞장서기 시작했다. 70-80년대를 지나는 동안 김 추기경은 우리사회 민주화 운동의 버팀목이자 잣대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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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를 위해 싸우는 것은 결국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그것은 인간을 위하고, 인간다운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인간다운 삶이 유린되는 사회와 개인을 구원하여 사랑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사랑하기 위한 싸움에서 미움만이 남아있는 경우가 없지 않은지 우리는 반성해야 합니다. 때문에 불의를 보고 분노하며 자신의 개인적 안락과 미래까지도 포기하면서 정의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싸우는 이들도 이 민족을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한다면, 이 민족 사회가 결코 미움과 대립의 사회가 되지 않고 사랑의 사회가 되기를 원한다면, 그분들도 먼저 하느님과 화해해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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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와 평화를 구하는 9일 기도 메시지, 1986. 3. 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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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학순 주교의 ‘유신헌법 무효’ 양심선언 현장에 함께 한 김수환 추기경(1974. 7. 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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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지도자이자, 사회의 큰 어른으로 격동의 시대를 살아가는 것은 참으로 고독한 일이였다. 정부 압력은 물론 교회 안에서 쏟아지는 비판까지도 홀로 감수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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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1980년대 격동기를 헤쳐 나오는 동안 진보니, 좌경이니 하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다. 정치적 의도나 목적을 두고 한 일은 더더욱 없다. 가난한 사람들, 고통받는 사람들, 그래서 약자라고 불리는 사람들 편에 서서 그들의 존엄성을 지켜 주려고 했을 따름이다. 그것이 가난하고 병들고 죄지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사시다가 마침내 목숨까지 십자가 제단에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이라고 믿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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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방송·평화신문,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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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두고 김수환 추기경의 생각을 지배하는 큰 주제는 ‘인간’이었다. 인간을 위해 자신의 삶과 전 존재를 바치는 모범을 보여준 스승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고자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했다.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짙은 안개 속 같은 사회 분위기 속에서도, 절대 중심을 잃지 않고, 바른 항해길을 인도하기 위해서 그가 짊어져야 했던 십자가는 너무나 막중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1987년 6·10 민주항쟁 때도 명동성당 공권력 투입이라는 일촉즉발의 위기를 그런 믿음 하나로 막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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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안으로 경찰이 들어오면 맨 앞에 내가 있을 것이고, 그 뒤에 신부들, 수녀들이 있을 것이오. 우리를 다 넘어뜨리고 난 후에야 학생들이 있을 것이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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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김 추기경의 관심은 도시빈민· 탈북주민?·국인 노동자?·매매 여성·미혼모·무주택자 등 매우 다양한 소외 계층으로까지 확산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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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9. 4. 24 영등포 교도소 미사 ] “우리 자신이 변해야 세상이 변합니다. 우리들 하나하나가 진실한 인간, 정의의 인간, 사랑의 인간이 되어야 세상이 진리와 정의와 사랑으로 가득 찬 세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묵은 내가 죽고, 새로운 나, 그리스도를 닮은 새 인간이 내 안에서 나고, 자라고, 성숙해지는 것입니다.”(영등포 교도소 미사 강론, 1980. 4. 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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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형수들을 위한 미사강론 ] “언제 어떻게 죽느냐? 하는 차이는 있어도 결국 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는 여러분이나 저나 이 자리에 있는 누구나 세상사람 모두 같습니다. 그러기에 사형수라는 처지가 결정적인 것은 아닙니다. 결정적인 것은 주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얻느냐? 얻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주님은 바로 우리 인간이 죽음의 운명을 쓰고 절망에 빠져 있을 때 우리는 위해 오셨고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구원하셨습니다.” (서울구치소 사형수들을 위한 미사강론, 1999. 7.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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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3. 1 미얀마 아웅산 참변 희생 100일 추모 미사 ] “미얀마의 수도 랭군에서 여러분의 사랑하는 이들이 폭사할 때 하느님도 함께 폭사하셨습니다. 그 기막힌 죽음의 쓴 잔을 하느님도 함께 마셨습니다. 그분들과 함께 계시다가 죽음의 순간에는 물러서고 마는 그런 하느님을 우리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당신 아들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릴 때 함께 매달리셨던 것처럼 그렇게 하느님은 여러분의 사랑하는 분들의 죽음과 고통 속에서도 역시 함께 계셨습니다.” (아웅산 참변 희생자 100일 기일 미사강론, 1984. 1. 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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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5. 8. 27~29 사북 탄광에서의 현장 체험 ] 추기경은 가난한 사람 속에 현존하는 하느님을 만나는 현장 생활 체험, 즉 아시아 사회 주교 연수회(BISA)의 일환으로 사북 탄광을 찾았다. “피상적으로 듣고 보았던 현실보다 현장의 어려움은 너무 심각했습니다.…교회의 제반 여건이 그들과 무관하지 않으면서도 그들과 거리가 멀어진 삶을 살고 있어 현장 생활 체험이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번 기회는 우리 주교 자신들에게 커다란 반성의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현재 교회 공동체가 진정한 공동체인가 자문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주교는 물론 성직자?평신도들에게까지 현장 생활 체험이 확산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가톨릭신문, 1985. 9. 15 인터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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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9. 2. 19 ‘막달레나의 집’ 방문 ] “추기경님은 막달레나의 집 식구들이게 행복하고 건강하라는 덕담과 함께 오천원씩 세뱃돈을 주었다. 누구에게든 똑같이 오천 원씩 주었다. 그러자 식구 한 명이 문제 제기를 했다. ‘추기경님, 이건 좀 불공평해요. 애들도 오천 원, 어른은 좀 더 주셔야죠.’ 추기경님은 눈이 안보일 정도로 껄껄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나한테는 자네들이 다 어린아이라네.’”(《막달레나, 막달래나?》에서)
추기경은 매춘 여성들의 인권을 보호하고 사회 복귀를 도와주고 있는 ‘막달레나의 집’을 처음으로 방문하였다. 막달레나의 집을 운영하는 이옥정씨는 추기경이 방문하던 날에 대하여 “들뜬 마음으로 추기경님을 맞이했는데 옷차림이 좀 이상해 보였다. 텔레비전에서 보던 근엄하고 깔끔한 모습과는 달리 후줄그레한 감색 점퍼에 구김이 심하게 진 허름한 바지를 입고 나타나셨다. 동행자라곤 딱 비서 한 명뿐이었다.”라고 적었다. (《막달레나, 막달래나?》에서)
“올바른 사랑의 실천으로 에이즈를 예방하고 감염자들이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가도록 사회적 여건과 분위기를 조성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한국 에이즈 연맹 창립2주년 기념 조찬회 격려사, 1995. 7.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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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국인 근로자를 위한 미사 ] “필리핀의 전 대통령이신 코라손 아키노 여사가 연초에 이곳을 방문했을 때, 저는 이곳에서 여러분 모두와 함께 미사를 드리겠노라고 약속한 바가 있습니다.…여러분들은 고향과 가족을 두고 여러분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위해 머나먼 나라인 한국으로 떠나 왔습니다. 여러분은 때로는 향수병으로,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떨어져 있음으로 해서 힘드시리라고 생각합니다.…설상가상으로 여러분은 때때로 부당하거나 혹독한 대우를 받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이는 끔찍한 일이며, 저는 그와 같은 일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길 바라고 기도합니다.” (외국인 근로자를 위한 첫 미사 강론, 1994. 4. 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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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8년 장애인 올림픽 ] “성화를 여기 밝힌 목적은 장애자 올림픽을 계기로 장애자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드높이기 위해서입니다. 즉 우리 자신을 비롯하여 교회의 모든 이가, 나아가 우리 사회의 모든 이가 이 횃불처럼 장애자에 대한 사랑의 불을 밝히고자 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또 하나는 이 횃불은…저 자신의 해석일 수 있겠습니다만…장애자들이 자신들이 겪는 시련을 용감히 극복함으로써, 우리를 위하여 밝히고 있는 희망과 사랑의 등불입니다.” (장애인 올림픽 성화 명동성당 안치 및 장애인을 위한 미사 강론, 1988. 10. 15)
남북한 장애인 걷기 본부가 주최한 이 행사에서 장애인 73명에게 보장구 및 생활 보조금을 전달하였다. 총재인 추기경은 격려사를 통해 “보장구나 성금을 보내는 일 그 자체보다 장애인에 대한 우리 모두의 의식 변화가 더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사랑의 보장구 보내기 전달대회, 1994. 4. 12.)
「세계의 장애인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사회와 교회에서의 장애인 소외 현상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우리나라 사회가 언제 참된 인간다운 사회가 되느냐? 그것은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사라질 때입니다.” (‘장애인에 대한 편견극복’ 프로그램진행자 김연종 박사와의 대담, 1996. 5.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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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희생자를 위한 미사 ] “우리는 외양으로는 그럴싸하게 화려하게 큰 집을 짓고 새 도시를 건설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참으로 모래 위에 지은 사상누각에 불과하였습니다. …우리가 좀 더 정직하였더라면, 좀 더 성실하고 책임감이 있었더라면, 돈보다는 사람을 먼저 생각할 줄 알았더라면,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거나 망해 버린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루가 9,25)고 하신 복음 말씀대로 인간과 인간 생명이 모든 가치 중에서 제일간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살아왔더라면, 그리고 누구보다도 우리 정치인과 경제인들에게 이런 인간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돈이나 권력에 대한 욕망에 앞서 있었더라면 이런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희생자를 위한 미사 강론, 1995. 7. 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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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군 위안부 인권 회복을 위한 기도회 ] “저는 이 문제에 대하여 금년 1월 10일부로 일본의 무라야마 수상에게 편지를 쓴 일이 있습니다. 편지 내용은 일본 정부가 위안부 문제에 대하여 국가로서 개인 배상을 하지 않고 민간 모금으로 피해자에게 ‘위로금’을 지급할 방침을 세운데 대하여 강력히 유감의 뜻을 표한 것이었습니다. …병사들의 성적 욕구 충족을 위해 여성을 전쟁터에 강제로 끌고 가서 강간을 일삼은 것은 분명히 윤리와 도덕에 반하고 여성에 대한 더할 수 없이 큰 모독이며 용서받을 수 없는 인권 유린입니다.…일본은 과거 제국주의 시대에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범한 모든 반인륜적·반도덕적 죄를 깊이 인식하고 뉘우치고 사죄해야 합니다. 그럴 때 일본은 참된 의미로 우리의 이웃이 될 수 있고 일본 자신도 큰 나라로 인정받을 것입니다.” (일본군 위안부 인권 회복을 위한 기도회 미사 강론, 1995. 12.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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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추기경은 하느님께서 주신 고귀한 생명의 가치가 사라져 가는 것을 크게 안타까워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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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불행하게도 귀한 생명의 소중함을 깊이 깨닫지 못하고 있다. 많은 생명이 이 땅에서 죽어가고 있다. 낙태가 그렇고 교통사고로 죽는 건수가 세계에서 제일 높은 것이 그렇고, 이보다 수적으로 더 많아지는 자살이 그렇다. 생명 존엄과 그 가치를 모르면 이는 인간으로서 기본 가치를 모르는 것이다. 인간 존중, 인간 사랑이 없는 곳엔 삶의 가치도, 의미도 없다. 이런 사회는 죽음의 문화가 지배하는 사회다. 우리는 지금 생명이냐, 죽음이냐 갈림길에 서 있다. 참으로 깊이 반성해 봐야 할 것이다. 생명은 어머니 뱃속 잉태 순간부터 시작되고 작은 배아도 인간이다. 생명운동이 전 교회와 사회로 확산되길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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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대성당, 2005. 12. 4 생명미사 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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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기경 김수환. 서울대교구장직에서 물러났지만 여전히 정겨운 벗이자 착한 목자로 우리 곁에 머물러 있다. ‘혜화동 할아버지’의 넉넉한 웃음과 힘있는 강론은 예나 지금이나 우리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