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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신경숙 장편, <엄마를 부탁해> - 너를 있게 한 `그`를 기억해 !

klgallery 2009. 3. 4. 13:34

신경숙 지음  /  도서출판 창비 펴냄

나의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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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성애는 본능이다.  그러나 본능이기에 앞서 그 사랑은 완벽하고, 절대적이다.  고려 속요 <사모곡思母曲>은 어머니의 사랑을 읊은 노래로는 역사적으로 가장 유명하다.  <사모곡>의 작자는 아버지의 사랑을 호미에, 어머니의 사랑을 낫에 비유하면서 자식사랑에서의 어미의 본능과 절대적 우위를 설명했다.  세상의 숱한 아버지들이 <사모곡>을 읽으며 머쓱할 정도로, 그 비유는 시의적절했으며 정곡을 찌른 듯 했다.   어머니의 사랑, 엄마의 마음, 그 높고 깊이를 재차 설명할 필요가 무엇이겠는가? 

 

신경숙의 장편 <엄마를 부탁해>가 돌풍을 일으켰다.  베스트셀러에 단박에 오르더니 좀체 내려오려하질 않는다.  독자들이 이 소설에 열광하고 있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 밀려드는 하나의 기시감의 정체는 뭘까?  딱 10여년전 이맘때 우리 경제가 IMF의 손아귀에 들어간 시점에 우리는 비슷한 현상을 목격한 바 있다.  1996년 출간돼 100만 부가 팔려 나간 김정현의 소설 <아버지>는 외환위기와 맞물려 췌장암에 걸린 아버지의 시한부적 삶을 그리면서, 그간 공기처럼 당연한 듯 존재하던 아버지가 가족의 무관심과 몰이해로 점차 소멸해 가는 모습을 그렸다.  이땅의 무심한 아내와 자식들에게 반성문을 쓰게 만든 그 소설을 나또한 군문을 나오기 2개월전에 강원도 전방 철책선의 어느 고지에서 열독한 바 있다.  

 

10여년을 주기로 반복되는 경제적 한파와 아버지와 어머니를 각각 주제로 담고 있는 이 두 소설의 비슷한 흥행이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모르겠으나, 이 모두가 왠지 달갑고도 씁쓸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우리는 어쩌면 기초적 삶의 기반이 흔들리는 순간에야 진정 소중한 것에 눈을 돌릴 줄 아는, 늦은 깨달음에 익숙한 존재들인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신경숙의 장편 <엄마를 부탁해>를 읽었다.  소설 속 엄마는 아마도 치매를 앓고 있는 듯 했다.  남편과 동행한 서울길 어느 번잡한 지하철역에서 오는 열차를 아버지만 타고, 엄마는 타질 못한다.  엄마는 아마도 치매 때문에 정신이 가물거려 멈칫했고, 그런 엄마를 무심하게 평생 앞질러 다녔던 아버지는 그 무심한 습성 때문에, 뒤도 쳐다보지 않고 혼자 지하철에 몸을 싣는다.   `엄마의 실종', 은 이제 이 소설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실타래의 기능을 한다.  각자 앞만 보며 바쁘게 살아가는 자식들의 평온한 수면(水面)에 작은 돌멩이 하나가 던져진 듯 하다.  그 돌멩이는 자식들의 일상에 미미하지만, 못내 씁쓸한 영향들을 미쳐온다. 

 

이 소설속에는 여러명의 화자가 등장한다.  여류 소설가인 `너'와  큰 아들 `그' 그리고 둘째 딸 또다른 `네'가 그들이다.   이제 이 소설은 이들의 기억을 좇아 가면서 어린시절 , 그리고 지금, 대체 엄마는 그들에게 어떤 존재였으며,  현재 어떤 모습으로 자신들의 삶에 존재하고 있었던 건지, 그 의미를 파고들며, 슬며시 반성문의 노트와 볼펜을 이 화자들에게 들이밀고 있다.  이 소설의 독자는 각기 다른 관점으로 포착된 이들의 노트를 훔쳐보며, 그 반성문의 한구절 한구절에서 끝없는 동질감과 공감에 이르는 경험을 한다.  신경숙의 소설이 독자에게 선사하는 최고의 애프터서비스는, 아마도 소설 속 화자들의 반성문 쓰기에 독자들의 참여를 자연스레 유도한다는 데 있다.

 

이 과정에서 이 소설 속 화자들은 하나의 깨달음에 이른다.  그건 엄마의 실종 시점에 대한 독특한 인식이다.  엄마는 그날 그 서울의 어느 지하철역에서 실종된 것일까?  현상적인 사건으로만 풀이하면 그것이 맞다.  그러나 보다 정확한 시점을 이야기할 땐 실종 시점은 훨씬 앞당겨진다. 이 사실이 바로 신경숙 소설이 독자에게 전하는 가장 큰 메세지이며, 경고문이다.  그것은 이미 화자들이 고향을 떠나고, 어른이 되고, 그리고 새로운 가정과 새로운 일에 파묻히던 순간이었다는 사실.  즉, 그들이 더 이상 엄마의 보살핌과 엄마의 사랑과 엄마의 관심을 필요로 하지 않고도 홀로 설 수 있던 시기에, 이미 엄마가 실종되었다는 무서운 진실,  바로 그것이다.

 

화자들은 어른이 되고,  행복한 가정과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갖게 되고부터 엄마를 마음속에서 지워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엄마와 화자들 모두에게서 일어난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화자들에게만 일어난` 진실이다.  공통적인 변화가 아니라, 일방적으로 한 편, 즉 자식들에게만 일어난 현상이다.  엄마는 몇 십년전 자신들을 보살피던 그 시절의 엄마와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엄마는 언제나 엄마로서만 존재했고 존재하려 했다.   모든 비극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변화와 정체, 아니 신의성실(信義誠實)과 배신,  인간과 한 인간 사이의 이 불균형이 엄마의 실종이란 비극을 낳은 것이다.

 

믿었던 존재, 나의 분신, 나의 모든 것, 나의 희생과 나의 공덕과 나의 아픔의 산실`이고', 산실`이었던`,  `너'에게서 `그'가 지워지는 순간 엄마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것은 `그(엄마)'에겐 더이상 살아가는 동력의 상실로 나타나며, `너(화자)'에겐 너 자신의 비열함과 교만함과 오만함이 자백되는 순간으로 다가선다.  이제 이 소설을 읽어가는 독자들의 가슴이 아릴 차례다. 우리가 잃어버린 엄마, 우리가 잊어가고 있던 엄마, 의 안타까운 모습들이 이 소설 속 곳곳에 박혀 날카로운 압핀처럼 독자의 눈을 찌르고 있다.

 

"너의 엄마에게도 첫걸음을 뗄 때가 있었다거나 세살 때가 있었다거나 열두살 혹은 스무살이 있었다는 것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너는 처음부터 엄마를 엄마로만 여겼다. 처음부터 엄마로 태어난 인간으로.  엄마가 너의 외삼촌을 두고 오빠! 부르며 달려가는 그 순간의 엄마를 보기 전까지는." p. 36 <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엄마는 상식적으로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살아온 인생이 아니야. 엄마는 엄마가 할 수 없는 일까지도 다 해내며 살았던 것 같아. 그러느라 엄마는 텅텅 비어갔던 거야. 종내엔 자식들의 집 하나도 찾을 수 없는 그런 사람이 된 거야. " p.260  <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엄마는 오늘의 `너'를 있게 한 `그'였다.  엄마는 더 이상 힘이 없다. 너에게 무엇을 하라, 고 지시내릴 수 없다.  엄마에게서 권력은 이미 떠나가 버린 후이고, 그는 권력이 아니라 무력함으로 존재하는 한 인간이다.   그러나  오늘의 너가 되기전까지 너를 있게 한 따뜻한 힘을 소유했던 권력자는 바로 지금 내 곁에 존재했었던 엄마였다.  이제 우리는 이해의 범주를 넓혀보도록 하자. 이 힘의 불균형과 배신은 부모와 자식이라는 그 영역에서만 살펴볼 것은 못된다.  세상사 모두가 그러한 교훈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기 때문이다.

 

용산 철거민 진압 화재로 수명이 죽고 다쳤다. 죽고 다친 철거민들은 한때 권력에 표를 던진 사람들일 수도 있다. 즉, 과거의 무능이 현재의 권력이 되도록 한 것은 힘없는 국민들이다.  엄마를 무시하는 잘난 자식들도 한때는 엄마의 보살핌과 관심을 욕망했던 힘없는 존재였다면, 지금 권불십년(權不十年)의 교훈을 명심해야 할 권력도 불과 얼마전까진 국민에게 한표 한표를 구걸하고, 욕망했던 자들이었다.  이제 모든것을 갖고 있는 이 소설속의 화자(권력)들처럼, 비굴하고, 비열하게 굴어선 안될 일이다.   지금 그 당당한 힘을 갖게 되기까지 과거 자신들이 엄마(국민)의 품안에 안겨, 얼마나 그 사랑을 갈망했던지, 훌륭한 사람이 되고 힘이 있는 사람이 되어(권력을 잡고), 다시 엄마(국민)에게 보답하고 잘 보살피겠다고 약속하질 않었는지,  자신들이 찍어논 과거의 비디오(선거공약)을 되돌려 보라.

 

이 소설속 자식들은 엄마가 실종되고 나서야 엄마를 찾기 위해 길을 나선다.  후회할 시점엔 이미 엄마는 새가 되어, 자식들을 안쓰러운 마음으로 찾아든다.  엄마는 누구의 보살핌도 받지 않고, 추운 겨울 서울의 어느 구석진 골목에서 죽음을 맞았을 것이다.  엄마는 버림받았다.  한겨울 용산의 빌딩 망루에서 울부짖던 우리들의 가난한 이웃이 주검으로 되돌아 오듯이, 그렇게 소설속 엄마는 죽음을 맞았다. 철거민의 타버린 시신은 가족의 동의조차 구하질 않고, 부검당했다,한다.  누구를 위해 `너(권력)'는 존재하는가?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공>의 작가 조세희씨는 용산 철거민 참사 현장에서 이 시대를 이렇게 정의 내렸다. 

 

"우리는 낙원이 아닌 아주 불행한 시대에 떨여져 있습니다"  2009년 1월 22일 목요일자 <경향신문> 인터뷰 中, 조세희

 

엄마를 영원히 잃어버리기 전에 당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우리에게 사랑으로 비워주고 빈껍데기가 되어 버린, 주름진 그이를 위해 당신은 처음 무엇을 시작해야 하는가?   기억하는 것이다.  너를 있게 한 `그'를 기억하는 것이다.  권력이 있게 한 `그'를 기억하는 것이다.

 

 

 

 

 

2009.1.24

출처 : 개츠비의 독서일기
글쓴이 : HPJlov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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