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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자스에서 태어난 독일계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자이면서 철학자요 또한 음악가인 동시에 의사이기도 하다. 21세 때 인류에게 직접 봉사하는 생활을 하겠다고 결심한 뒤, 1905년부터 의학을 공부하기 시작, 의사 자격을 취득해, 1913년 가봉(당시는 프랑스령 적도 아프리카)의 랑바레네에 병원을 설립했다. 그리하여 평생을 두고 원주민의 진료와 전도에 헌신했다. 1952년에는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한편 음악가로서의 재능도 뛰어나, 1905년에는 바흐 연구의 표준적 저작인 "바흐전"을 저술했으며 또한 오르간 연주도 뛰어났다. "물과 원시림 사이에서", "생명의 외경" 등의 저서가 있다. 사랑의 사업을 스스로 실천한 현대의 성인이라고 할 수 있다.
다재 다능했던 거인
인간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자기가 하고자 했던 일에 정통하게 되고 그리하여 일가를 이루는 데는 얼마나 많은 노력과 공부가 필요한지 모른다. 대부분은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도중 하차하거나, 아니면 포기한 채 생각만으로 끝내는 경우가 허다하다. 아니 대부분이 그런 길을 걷고 만다.
그런데 슈바이처의 경우는 그렇지가 않았다. 그는 음악가(피아니스트, 작곡가)로 대성해 그 정상의 자리를 차지했고, 동시에 신학자(목사 및 예수 연구가)로서 뛰어난 연구 업적을 남겼으며, 그밖에 바흐 연구가, 괴테 연구가로서도 이름을 떨쳤다. 그가 얼마나 다재 다능했으며, 이를 위해 쏟은 정성과 노력이 얼마나 대단했나 하는 점을 헤아려 짐작할 수가 있다.
그런데 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 누구도 쉽게 하지 못할 귀한 일을 해놓고 갔다. 그는 대학 교수이자 목사이면서 다시 학생이 되어 공부를 시작해서 의학 박사가 되어 의술을 철저하게 익힌 뒤 남아프리카의 적도 부근의 오지에 가서 나병 환자를 위시해 열악한 환경에서 굶주리고 병든 사람들을 위해 스스로 인술을 펼쳐 그들을 돕고자 온 힘을 기울였다.
이 점이 그의 가장 위대하고 성스러운 점이었다. 사랑은 설교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절실하게 인식해, 그 사랑의 길을 직접 실천했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인생은 90세에 이르도록 계속되었다.
말하자면 슈바이처의 인생은, 한 인간이 일생 동안 도대체 얼마만한 일을 해낼 수 있는가 하는 한계점을 보여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그에게서 크나큰 격려와 희망을 얻을 수가 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또한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을 소중히 생각하여 그러한 예술과 문화를 키우려고 노력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가 다재 다능한 인간이라는 것은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지만, 그것보다도 옳다고 생각한 일에 대해서는, 어떤 어려움이 뒤따른다고 해도 이를 끝까지 해내는 강한 의지와, 제한된 시간을 충분히 활용하는 실행력, 모든 어려움을 끝까지 참고 버텨내는 정신력과 체력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아프리카로 떠나겠다고 결심한 것은 그의 나이 21세 때로, 그때 이미 그는 자기 인생을 남을 위해 바치겠다는 각오가 서 있었고 그러기 위해서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더위가 유달리 심한 콩고 강 유역의 삼림 지대에서 생활하고 있는 아프리카 부족의 얘기, 농작물이 잘 자라지 않는 늪지대에서 조금이라도 농작물을 더 얻기 위해 고투하고 있으며, 그 중에는 살이 문드러져 그나마 부락에서 추방된 나환자도 상당수가 된다는 이야기하며, 사람이고 가축이고 마구 죽어 간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다.
그렇듯 참혹한 상태에서도 몇 백 킬로미터 사방에 의사가 한 명도 없다는 얘기도 들었다. 그리하여 이들을 도와주지 않는 것은 오히려 죄를 짓는 일이라고 절실히 깨달았던 것이다.
그렇듯 많은 일을 했으며, 버림받은 자를 구제하고, 인류애를 직접 실천하는 등 누구보다도 하기 어려운 초인 내지 성인의 길을 걸은 슈바이처. 그렇다면 과연 그는 소년 시절, 청년 시절을 어떻게 보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내성적이면서도 지기 싫어하는 성미
어느 늦가을의 오후 4시경. 산기슭에 가로놓여 있는 조용한 마을. 초등 학교에서 그날의 수업이 끝나자 학생들이 문을 박차고 밖으로 뛰어나왔다. 그들 중에는 하급생인 슈바이처 소년과 그의 친구 한 명도 있었다. 그 친구와 슈바이처는 어울려 하교길을 내려오고 있었다. 친구인 그 소년은 슈바이처 보다도 체구가 훨씬 컸다.
"너 나하고 힘 겨루기를 하고 싶다며?
나는 힘이 너보다 훨씬 세단다. 너 정도는 도저히 내 상대가 되지 않아!"
"그래?
그럼 어디 한 번 그것이 사실인지 겨뤄 볼까?"
평상시 그 친구되는 소년이 힘자랑을 했으며 슈바이처 소년의 나약해 보이는 체구를 깔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슈바이처 소년은 비록 연약해 보였지만, 뭔가 속에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옹고집 같은 것이 숨어 있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들판으로 달려 나간 두 소년은 그곳에서 한판 씨름을 벌였다. 두 소년은 서로 상대방을 내동댕이치려고 안간힘을 다했다. 한동안 팽팽한 힘겨루기가 진행되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슈바이처가 짧게 깎은 머리로 상대방의 가슴을 내질렀다. 상대방 소년이 놀라서 얼떨결에 손의 힘을 빼는 순간, 이 틈을 놓칠세라 몸을 뒤로 빼면서 상대방을 잽싸게 옆으로 당겼다.
상대방의 몸이 앞으로 쏟아지면서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이윽고 슈바이처가 친구의 상체를 타고 앉아서 생글생글 웃었다.
"맛이 어떠니?
내가 분명히 이겼지, 응 그렇지?"
"그래 네가 이겼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뭐냐?"
"그렇지만 너는 목사집 아들이라 1주일에 두 번씩이나 맛있는 고기 수프를 먹으니까! 너는 아직 한 번도 배를 곯아 본 일이 없지?"
이런 친구의 말에 슈바이처는 한마디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 친구의 말대로 그의 아버지는 목사였고, 그의 가족은 목사관에서 살고 있었다.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배를 곯아 본 일은 없었다.
슈바이처는 집에 돌아온 후에도 오래도록 친구가 한 말이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똑같은 친구이면서도 한편에서는 배를 곯는 쪽이 있다는 생각, 헐벗고 굶주리고 있는 평등치 못한 층이 있다는 생각이 어쩌면 아프리카 적도로 불쌍한 사람을 돌보겠다고 나서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조숙했다고 할는지, 이미 그 당시 그렇듯 어른스러운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영향으로 그날 저녁 식탁에 나온 고기 수프를 슈바이처 소년은 영 먹으려 하지 않았다. '다른 애들보다 잘산다고 여겨질 짓은 절대로 하지 않겠다.'
그는 이렇게 결심하게까지 되었던 것이다.
그의 이와 같은 내성적이고 수줍은 성격은 어머니를 닮아서인지도 모른다. 두 사람 다 같이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어도 그 내용을 좀처럼 말하려 하지 않았다. 서로가 다 같이 마음속으로 상대방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얼마 안 된 어느 일요일에는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다.
어머니가 슈바이처에게 입히려고, 아버지의 헌 외투를 그의 몸에 맞도록 고쳐 가지고 왔던 것이다. 그렇지만 슈바이처는 그 외투를 입고 가지 않았다. "어머니, 오늘은 춥지 않으니까 입고 가지 않을래요" 하고 거절했던 것이다. 자신이 다른 친구와 비교해서 특별해지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그의 차림새는 분명 추워 보였으며, 또한 실제로 한기가 몸속으로 배어들어 추웠지만, 슈바이처는 절대로 떨지 않겠다고 단단히 마음을 다져먹고 있었던 것이다. 새 모자를 만들어 주었을 때도 마찬가지로 낡은 헌 모자를 고집하여 그것을 쓰고 등교했다. 이런 사정이 아버지의 귀에까지 들어가 꾸중을 듣기도 했다.
그는 물론 아버지를 사랑하고 있었으며, 또한 존경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리하여 부모님의 말을 순순히 따라 부모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다. 그렇지만 학교 친구들이 넝마 같은 낡은 옷을 걸치고 있는데 자기 혼자만 좋은 옷을 입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루는 목사관으로 손님이 찾아왔는데, 슈바이처 소년이 낡은 스웨터에 벙어리 장갑을 끼고 오래된 털모자를 쓰고 나타났다가 아버지로부터 크게 꾸중을 듣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러고서도 슈바이처는 다른 친구들이 갖지 않는 물건을 자기 혼자서 가질 생각은 전연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아버지에게 단장으로 몇 차례 얻어맞기까지 했다. 그렇지만 아무에게도 말은 하지 않았으므로 그런 사실이 있었다는 것을 친구들은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적당히 하지 못하는 체질
슈바이처가 겨우 다섯 살이 되었을 때 그는 아버지로부터 구식 피아노로 음악을 배우기 시작했다. 소년은 그다지 큰 힘을 들이지 않고서도 악보 읽는 법을 익혔다. 그리하여 쉽게 연주까지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슈바이처는 악보를 보면서 연주하기보다도, 그저 귀로 듣기만 한 노래나 곡에 혼자서 생각해 낸 반주를 붙여서 치는 것을 더 좋아했다.
피아노 앞에서 피아노 연습을 하고 있는 줄 알았던 슈바이처가 스스로 작곡한 곡을 열심히 즐기고 있는 것을 보고 어머니는 감회가 새로웠다. 친정 아버지도 훌륭한 음악가였는데, 이미 돌아가셨지만, 아들이 외할아버지를 닮은 것 같아서였다. 아버지가 꼭 그런 분이셨기 때문이다.
어떻든 심심하면 자신도 모르게 피아노 앞에 앉아 건반을 두드리는 것이 거의 습관화 되다시피 했다. 말하자면 그것이 은연중에 공부가 되었던 것이다. 슈바이처의 나이 여덟 살이 되었을 때 피아노의 기초가 튼튼해지자 파이프 오르간을 가르쳐 달라고 졸라 드디어 이를 배우게 되었다.
이때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너는 점점 외할아버지를 닮아 가는구나. 저 낡은 피아노도 외할아버지가 엄마한테 주신 거란다."
"외할아버지도 파이프 오르간을 치셨나요?"
"물론이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만, 내가 어릴 적에는 마을 사람들이 외할아버지의 연주를 듣고 싶어서 늘 교회로 찾아와서 열심히 듣곤 했단다. 외할아버지는 그 즉석에서 즉흥곡을 치기도 했고, 연주중에 화음을 연달아 생각해 낼 수도 있으셨단다."
이리하여 어느 날 저녁 슈바이처는 파이프 오르간이 설치돼 있는 교회의 가파른 뒷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수염이 무성한 나이든 선생이 그에게 파이프 오르간을 가르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슈바이처는 걸상에 앉았지만 오르간의 발판에 쉽게 발이 닿지 않았다. 늙은 선생님이 음정의 하나하나를 꺼내 놓은 다음, "자, 건반을 눌러 보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슈바이처는 자기가 대단히 좋아하는 바흐의 곡을 손으로 치기 시작했다. 가까스로 칠 수 있었던 건반이었지만, 거기서 울려 나오는 현묘한 음에 자신이 매료되어 들어갔다. 그로부터 1년도 채 되기 전인 아홉 살 때, 슈바이처는 예배 시간에 대리 주자를 맡을 수 있을 만큼 솜씨를 갖추게 되었다. 언제나 자기가 치는 음에 사로잡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열심히 공부했기 때문이었다.
1884년 아홉 살 때 슈바이처는 초등 학교를 졸업하고, 계곡을 훨씬 거슬러 올라간 곳에 있는 뮌스터라는 읍의 중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슈바이처는 독일어와 프랑스어를 함께 들으면서 성장했기 때문에 2개 국어를 다 같이 잘 구사했다. 편지를 불어로 쓰면서도 학교에서는 독일어로 수업을 받는 식이었다.
등교길은 4킬로미터의 산길로 이어져 있었다. 그는 시골 태생의 소년이었으므로 걷는 것이 즐거웠다. 그는 완전히 자연과 친해져, 될 수 있으면 혼자 걷고 싶어했다. 그렇다고 남과 사귀기를 싫어한 것은 아니었다. 순간적으로 부르르 화를 내는 버릇은 있었지만, 그는 남들이 호감을 갖게 하는 좋은 성질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지만 매사에 적당히 해버리는 일이 없었다. 운동 경기에 있어서도 남들이 적당히 하면
화를 잘 냈다. 특히 자신과 대적하여 경기를 했을 때, 예상보다 쉽게 상대방이 지게 되면 일부러 져줬다고 화를 냈던 것이다. 그렇지만 조그만 일에도 잘 웃었으므로, 그에게는 웃음보라는 별명이 붙여지기도 했다. 심지어 그는 웃을 때에도 온 힘을 다 쏟아 힘껏 웃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이런 식으로 매사에 전력 투구하는 습성이 생겨 버렸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웃고만 지낼 수 없다는 생각에 가끔씩 빠져들게 되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동물을 무척 좋아했다. 늙은 말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장면, 특히 끌려가지 않으려고 꽁무니를 빼는 장면을 목격하고는, 그 장면이 몇 주일 동안 눈앞에 떠올라 몹시 애를 먹었다. 밤에 잠자리에 들어서도 눈을 감기만 하면 눈앞에 그 광경이 어른거려 잠을 이루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이런 의문을 갖게 되었다. 어째서 인간에 대해서만 기도를 하는지,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모친이 잘 자라는 키스를 하고 돌아간 다음, 촛불이 꺼진 어두운 방 안에서 짐승들을 위해 몇 분 동안의 짧은 기도를 드리곤 했다.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 목숨 있는 모든 것에 자비를 베푸시옵서. 동물들을 재난으로부터 지켜 주시어 편안히 잠들게 하옵소서."
그 후 새를 잡는 고무총을 친구가 만들어 주었지만 그는 결코 새 사냥을 하지 않았다. 친구가 돌멩이로 새를 맞추어 잡는 광경을 목격하고는 더욱 그러했다. 주둥이를 벌리고 파닥거리면서도 따뜻한 체온을 아직도 유지하고 있던 참새의 마지막 모습.
"너 죽이지 말지어다!" 하시는 일요일마다 아버지가 읽으시는 성경 말씀이 귀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하여 친구와 어울려 참새들이 몰려 있는 나무 근처에 접근했을 때, 슈바이처는 자기도 모르게 손바닥을 딱 쳐서 새들을 날려 보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변명도 늘어놓지 않고 친구 혼자 남겨놓고 뛰어서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꼴찌에서 우등생으로
슈바이처의 친척 중에 마리 아주머니와 루이 아저씨가 있었다. 아저씨는 공장이 많은 퀼루즈에서 학교 전체의 감독관으로 있었고, 마리 아주머니는 전직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다. 그런데 두 사람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으므로, 슈바이처의 부모가 다섯 아이나 돌보고 있는 것을 딱하게 여겨, 목사의 아들인 슈바이처에게 장학금을 줄 수 있는 퀼루즈 고등 학교에 입학시켜 졸업할 때까지 집에 두고 보살펴 주기로 했다.
슈바이처는 낯선 퀼루즈까지 간다는 것이 어쩐지 자기 혼자서만 쫓겨간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가족과 오랫동안 헤어진다는 서글픔도 꾹 참고 아마 말도 없이 부모의 말씀에 따랐던 것이다. 그리고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두고 슈바이처는 다시 고향의 부모 곁으로 돌아왔다. 겨울 방학을 보내기 위해서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정색을 하고 슈바이처에게 말했다.
"내가 너에게 얘기해 두지 않으면 안 될 일이 생겼다."
슈바이처는 미리 재빠르게 알아차리고는, "제 성적표 때문에 그러시죠?" 하고 물었다. "그래, 그렇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단다."
슈바이처는 고개를 숙인 채 아버지의 말을 듣기만 했다.
"교장 선생님한테서 편지가 왔는데, 네 일로 상의할 것이 있으니 한 번 만나러 와 달라는 구나. 성적이 좋아지지 않는다면 수업료 면제 자격을 부득이 취소할 수밖에 없다는 거야. 그뿐만이 아니고 결국 너를 퇴학시키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고까지 말씀하셨단다."
아버지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아저씨 아주머니도 크게 낙담하고 계시단다. 만약 그 두 분의 보살핌이 없었다면 우리도 널 고등 학교까지 보낼 엄두를 내지 못했을 거야."
"죄송해요." 슈바이처는 이렇게 한마디 했을 뿐이었다.
"나는 네 머리가 둔해서 이렇게 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뭔가 그럴 만한 사연이 있어서겠지. 나는 너를 믿고 있다. 그러니 새 학기에 다시 학교에 가서 한 번 해보지 않겠니?"
슈바이처는 얼른 대답을 못했다. 가족들과 떨어져 있는 그곳 생활로부터 가능하면 속히 빠져나오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는, "예, 아버지 해 보겠어요" 하고 간단히 대답했다. 슈바이처는 그 다음 학기에 다시 고등 학교로 돌아와 열심히 공부를 시작했다. 평상시 싫어했던 학과에 특별히 힘을 경주했다. 그리하여 여태까지 질색이었던 수학도 남에게 뒤지지 않고 따라갈 수 있게 되었다. 남에게 지기 싫어했던 오기가 그대로 발동했던 것이다.
다만 책을 읽는 속도가 지나치게 빨라 아주머니의 충고를 받았다.
"남의 글은 문장의 맛을 볼 수 있어야 해. 문장이 가장 중요하니까!"
그리고 아주머니는 루이 아저씨의 서재에 있는 많은 책들을 자유로이 꺼내어 읽도록 허락해 주었다. 그러므로 그 동안 학교 공부만 열심히 한 것만은 아니었다. 주석이 달린 옛날 책을 비롯해 역사 소설, 전기문, 일기 등 가리지 않고 탐독하는 생활을 보냈다.
이윽고 선생님은 이제까지와 다르게 슈바이처가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그의 성적은 하루가 다르게 올라갔다. 마침내 학기말 성적표에 슈바이처는 꼴찌에서 상위권의 성적으로 진입해 있었다. 슈바이처는 부활절 휴가를 보내기 위해서 의기양양하게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 무렵을 경계로 아저씨와 아주머니하고도 아무런 격의 없이 친하게 지낼 수가 있었다. 그 밖에도 슈바이처는 슈테판 교회 옆에 있는 파이프 오르간 주자인 뮌히 선생에게 매일 빠짐없이 피아노를 배우러 다녔다. 선생은 채 30세가 안 되는 청년으로 땅딸막한 편이었다. 처음 얼마 동안은 집을 갓 떠나온 외로움으로 해서 피아노 공부도 잘 되지 않았다.
어느 날 모차르트의 소나타를 뮌히 선생이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집에서 연습해 가지고 가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슈바이처는 그 시간에 즉흥곡을 치는가 하면 마리 아주머니의 옛날 교본에 나오는 곡을 멋들어지게 치는 등 모차르트의 곡은 전연 연습도 하지 않았다.
하루는 슈바이처가 모차르트의 곡을 서툴게 치기 시작하자, 이것을 한참 듣고 있던 선생의 입에서 드디어 호통 소리가 터져나왔다. "너에게는 이렇듯 아름다운 곡을 칠 자격이 없어!"
슈바이처는 집으로 돌아가면서 "음악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니, 선생님은 뭘 모르셔!" 라고 혼자 중얼거렸다. 철든 이후 음악은 슈바이처에게 있어 가장 큰 기쁨이었기 때문이다.
그날 부터 1주일 동안 슈바이처는 모차르트의 곡을 정성 들여 연습했다. 이미 그는 전에 노래 부분에 해당되는 멜로디와 하프 곡 같은 반주부가 마음에 들어 여러 번 쳐 본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 곡에 가장 어울리는 운지법까지 생각해 냈다.
다음 주에 슈바이처는 렛슨을 받으러 선생한테로 갔다. 슈바이처는 정성 들여 연습했다는 인상을 주지 않도록 극히 자연스럽게 쳐나가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뮌히 같은 음악 전문가는 연주만 들어도 휜히 아는 법이다.
슈바이처가 연주를 마치자, 선생은 그의 어깨에 다정히 손을 얹고는, 단지 "고맙다"고만 말했다. '고맙다'는 간단한 말에 모든 뜻이 다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날 이후 두 사람은 친한 친구 사이의 관계로 발전했다. 어울려 연탄을 치기도 했으며 교향곡의 총보를 읽기도 했다.
그리하여 15세가 되었을 때 뮌히 선생으로부터 정식으로 파이프 오르간을 배우기 시작했으며, 본격적으로 성 슈테판 교회의 음전이 62개나 있는 파이프 오르간으로 배우게 되었다. 선생은 슈바이처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손발을 정확하게 움직여 침착하게 서두르지 않고 제대로 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슈바이처는 곧잘 넋을 잃고 파이프 오르간 연주에 몰두하곤 했다.
이렇게 해서 1년 뒤에는 퀼루즈 합창단이 브람스의 레퀴엠을 공연하게 되었을 때 벌써 슈바이처는 파이프 오르간을 맡을 만큼 솜씨가 크게 향상돼 있었다. 합창단을 지휘하는 뮌히 선생은 아무런 걱정없이 파이프 오르간을 슈바이처에게 맡길 수가 있었다. 바이올린과 첼로 소리가 노랫소리에 녹아들었으며 이어 슈바이처가 치는 파이프 오르간의 음향이 예배당 구석구석에까지 넘치면서 다른 음과 한덩어리로 조화를 이루었다. 슈바이처의 가슴은 한없는 기쁨으로 부풀어올랐다. 자신이 마침 내 소망을 이루어 진정한 파이프 오르간 연주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졸업 시험의 옷차림
이윽고 고등 학교의 상급생이 되자 슈바이처의 수학 실력도 아르바이트를 해서 가르칠 수 있을 정도까지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8개월 동안 수학을 가르쳐서 30달러나 저금할 수 있게 되었다. 슈바이처는 그 돈으로 중고 자전거를 한 대 구입하여 고향으로 돌아갈 때 타고 가서는 여름 방학 내내 아침에 서늘할 때 포도주 한 병과 잘 구운 빵 한 개 및 소시지 몇 조각을 배낭에 싸 넣고는 자전거를 타고 집을 나섰다. 그리하여 아름다운 자연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나자 슈바이처는 18세가 되었으며, 이제 졸업 시험만 무사히 치르면 졸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졸업 구술 시험을 받을 때는 규칙상 정해진 옷을 차려입고 가서 받아야 했다. "검정 색 저고리와 줄무늬 바지가 아니면 안 된다!" 마리 아주머니의 말이었다. 그런데 슈바이처에게는 검정색 저고리는 있었지만, 줄무늬 바지는 없었다.
"그렇다면 새 바지를 하나 마련해야겠구나" 하고 마리 아주머니가 넌지시 말했다. 그렇지만 슈바이처는, "무슨 말씀이세요" 하고 단호히 거절했다. "그저 시험날에만 아저씨 것을 하나 빌려 입도록 해 주세요." 그리하여 아저씨에게 빌린 바지 하나를 시험날 아침까지 양복장에 걸어놓은 채 그대로 지냈다.
이윽고 시험날 슈바이처는 일찍 일어나서 불을 켜고는 옷을 입기 시작했다. 그러나 바지를 입어 본 슈바이처는 깜짝 놀랐다. 땅딸막한 루이 아저씨의 옷이 여위고 키가 큰 슈바이처의 몸에 맞을 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 바지는 슈바이처의 허리께서 헐렁헐렁했으며 길이가 간신히 슈바이처의 무릎에 겨우 닿을 정도로만 내려와 있었다. 슈바이처는 하는 수 없이 바지 멜빵에 끈을 달아 길게 늘였지만, 여전히 장화 위에 닿을까 말까 할 정도였다. 슈바이처는 그렇듯 어울리지 않는 짧은 바지를 입고는, 서둘러 아침 식사를 마치고 집에서 뛰쳐나갔다.
학교에서는 동급생들이 시험관실 밖의 복도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 긴장하고 있었으며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슈바이처의 옷차림을 보고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도대체 그게 뭐니?"
"아저씨 바지야. 빌려 입었더니 이렇게 짧지 뭐니?"
친구들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배를 움켜쥐고 숨이 막힐 정도로 웃어댔다.
역사 시험에서, 다행히 슈바이처가 한 번 읽고 깊이 생각한 바 있던 문제에 대해 시험관이 질문을 했으므로, 마침내 시험관과 토론을 벌일 정도까지 되어 무난히 끝마칠 수 있었다. 슈바이처는 방학이 되자 부모님과 가족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런 어느 날 우편 배달부가 시험 성적이 들어 있는 봉투를 주고 갔다. 부친이 봉투를 빼앗아 갔다. "내가 더 궁금하니 먼저 봐야겠다!" 이윽고 봉투를 뜯어 본 부친이 말했다. "합격이다. 시험관이 네 역사 지식에 대해 대단히 만족했다고 써 놓았구나! 그렇다면 이제 드디어 대학에도 갈 수 있게 되었구나!" 둘이 집 안으로 들어가면서, 아버지는 아들의 어깨에 다정히 손을 얹고는 어깨를 밀었다.
1893년 가을 18세의 슈바이처는 스트라스부르 대학생이 되었다. 그 후 20년 동안의 대부분을 그는 이 도시에서 보냈다. 슈바이처는 이 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함과 동시에 음악 공부도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때문에 아침에 강의를 듣기 위해서 대학으로 자전거를 타고 갔다가는, 이내 점심을 먹으러 기숙사(성 토마스 신학교 기숙사)로 돌아왔다가, 이번에는 도서관이나, 아니면 파이프 오르간을 연습하기 위해 교회로 다시 달려가곤 하였다. 그는 파이프 오르간 연습에 들이는 것과 같은 정도의 정성과 노력을 또한 다른 학문 연구에도 쏟았던 것이다.
19세가 되었을 때 1년 기한으로 군복무를 하게 되었다. 하지만 군생활에서도 기회 있을 때마다 열심히 독서를 하는 등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행군중 단 10분의 휴식 시간이 있어도 그는 그리스어로 된 성서를 호주머니 속에 넣고 있다가 꺼내서 읽었다. 또는 밤에 야영을 할 때 전우들이 총검 끝에 소시지를 꿰어 구워먹고 있을 때에도 공부를 했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어려운 일은 솔선해서 했다. 포차가 진창에 빠졌을 때 혼자 앞장서서 끌어내는 일도 주저하지 않았다.
1년간의 군대 복무를 끝낸 그는 다시금 자유로이 대학 생활을 계속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의 독일의 대학에서는 한 과목을 대개 5년 내지 6년에 걸쳐 깊이 연구하고 나서 학위 논문을 써내야 했다. 슈바이처는 신학 학위를 딸 계획이었지만, 철학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했다. 슈바이처는 우연히 학교의 뜰에서 철학 교수와 마주친 일이 있었다.
교수는 그의 팔을 잡고 걸으면서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고 말했다. "자네는 철학 학위를 따고 싶은 생각은 없는가?"
"저는 신학 학위를 딸 생각인데요" 하고 슈바이처가 솔직히 대답하자 교수가 말했다. "그것도 좋지만 그래도 자네에게는 철학자가 될 소질이 충분히 있다는 생각이 드네. 자네 같으면 양쪽을 다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데."
교수는 평소에 슈바이처가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을 몇 차례 보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어 슈바이처는 그 후 1년이 지난 22세 때에는 두 개의 학위를 동시에 따기 위해 공부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혼자서만 행복할 수 없다는 사명감
그 무렵 슈바이처의 집안은 퀸스바흐의 새집으로 이사했다. 한 신도가 자신의 집을 희사한 것이다. 슈바이처는 21세의 여름 방학 때 이 집으로 돌아왔다. 따스하고 아늑해 살기 좋은 집이었다. 그러나 슈바이처는 이때부터 생각이 많아졌다. 훌륭한 대학 교수가 될까, 아니면 아버지처럼 시골의 목사가 되어 좋아하는 산골 마을에서 조용히 일생을 보낼까, 아니면 비도르(C.M. Widor) 선생처럼 파이프 오르간 연주자가 될까?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모두 아름다운데, 과연 자신에게 그것을 누릴 권리가 있는 것일까? 즉 세상에는 비참한 일이 많은데 자신이 이렇게 혼자서만 행복해도 되는 것일까? 인간에게 학대받는 소나 돼지, 그 밖의 동물들이 슬피 울어대는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명했다. 자신은 이미 스물 한 살이 되었으며 건강한 체구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뒤에는 행복한 가정이 있다. 동시에 앞에는 만족할 만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
나에게는 나라가 있고 친구가 있으며, 책이 듬뿍 있고 음악이 있다. 그런데 과연 이런 일들을 누릴 권리가 나에게 있는 것일까? 나는 결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가 괴로움으로 가득 차 있는 한 자신만의 행복을 기뻐하고만 있을 수 없다. 어떻게 하면 그러한 행복을 남에게 나누어 줄 수 있을까? 그들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 그런데 자기에게 주어진 것은 자기 자신뿐이 아닌가.
슈바이처는 자신의 계획을 천천히 세워 나갔다. 즉, 30세까지는 음악과 학문을 계속하고, 그 후부터는 자신의 생활 전부를 바쳐 세상 사람을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그때 슈바이처는 비로소 "나를 위해 제 생명을 잃는 자는 그것을 얻으리라"고 되어 있는 성경의 말씀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즉 자신이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 그 일이란 것을...
그리하여 처음으로 안정되고 흔들릴 줄 모르는 기분을 맛 보았다. 마침내 외계의 행복 뿐만 아니라 자신의 마음 속의 행복도 차지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슈바이처는 철학 박사 학위를 따기 위해 파리로 나가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때로는 밤새도록 논문의 주제를 선택하기 위해 독일 철학자의 두툼한 책과 씨름하기도 했다. 동시에 파리에 있는 기회를 이용해 두 선생에게 피아노를 공부했으며, 파이프 오르간의 대가인 비도르 선생에게 파이프 오르간의 지도를 받기도 했다.
모두가 그에게 공부에 대한 강한 의욕이 있었으므로 가능했던 일이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속담이 있듯이, 자신에게 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어서는 천재는 고사하고 평범한 사람도 되기 힘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슈바이처는 종종 밤을 꼬박 새워 파이프 오르간을 연습했으며, 스트라스부르로 돌아와서는 논문을 완성해 24세 때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슈바이처의 지도 교수는 대학에 남아서 철학 교수가 되어 주기를 바랐다. 그렇지만 그 무렵의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목사가 될 생각이었다. 25세 때 신학의 최종 시험에 합격한 그는 성 토마스 신학교 기숙사와 강을 마주보고 있는 성 니콜라스라는 이름의 자그마한 교회의 부목사가 되었다. 이 모두가 다 남이 잘 시간에 자지 않고 시간을 아껴 열심히 공부한 결과로서 얻어진 것이었다.
주말 휴가 때는 퀸스바흐까지 짧은 기차 여행을 하여 마을 교회에서 아버지 대신 예배를 주재하기도 했다. 봄에는 파리의 숙부와 숙모를 뵙고 또한 계속해서 비도르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말하자면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 공부를 위해 쏟아넣었다고 할 수 있다.
슈바이처는 성 니콜라스 교회에서 주는 월급이 14달러밖에 되지 않았으므로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그런 일에 대해서는 조금도 불평하지 않았다. 다행히 성 토마스 신학교의 기숙사에서 기거할 수 있었다.
슈바이처는 스트라스부르에 있었던 수년 동안 성가대에 연습할 때면 반드시 파이프 오르간으로 반주를 했으며, 나중에는 공연 때에도 반주를 했다. 파이프 오르간의 제작에 관한 논문도 완성했다. 그는 교회에서 예로부터 전해 오는 소리가 깨끗한 파이프 오르간을 떼어내고 장치가 복잡하고 소란스럽기만 한 커다란 현대식 오르간을 설치하는 것을 보고 몹시 실망했다. 그때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소가 좋고 나쁨은 뿔이 멋있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지 않고 젖이 좋으냐 나쁘냐에 달려 있다"고 말했던 것이다. 슈바이처는 바흐에 관한 책과 파이프 오르간 제작에 관한 책을 동시에 썼으며, 또한 신학에 관한 책도 함께 써 갔다.
"책을 건드려서는 안 됩니다"
이렇듯 그는 목사이기도 했으며 동시에 음악가였고 또 저술가이기도 했다. 마침내는 스타라스부르 대학의 교수가 되었으며 28세 때는 성 토마스 신학교의 사감에 임명되었다. 그 동안 제일 나이가 젊은 사감이 된 것이다. 성실하고 학식이 높으며 모든 면에 있어 열심인 그를 주위의 여러 목사들이나 학생들은 다 같이 존경했으며 좋아했다. 누구나가 몸도 마음도 넓고 큰 이 교수를 마음에 들어했다. 어떤 일이든 하나밖에 모르는 식으로 마음이 꽉 막히지도 않았으므로 학생들과 농담도 잘 나누었다. 그런가 하면 소란을 떨거나 당황해 쩔쩔 매는 일도 없이 산더미 같은 일을 척척 처리해 나갔다.
슈바이처도 현재의 처지를 만족스러워 했다. 강이 바라다보이는 위치에, 해가 잘 드는 넓은 방이 몇 개 배당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봉급도 많이 올랐으며 역사가 오래된 도서관도 마음대로 사용할 수가 있는 동시에 대학에는 훌륭한 친구들이 있었다.
성 토마스 신학교에는 중년이 지난 독일 태생의 과부가 사감의 시중을 들어 주는 가정부로 일하고 있었다. 몸을 사리는 일 없이 슈바이처를 위해 그의 주변을 돌봐 주었다.
"상냥하고 너그러우신 분이시죠. 차려 드리는 것은 무엇이든지 맛있게 드시고 옷은 손질이 되었건 안 되었건 마음에 두지 않으세요. 얘기를 나눌 때도 유명하고 훌륭한 분하고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가정부에게는 단 한 가지 고민거리가 있었다. 여기저기에 온갖 책들이 산더미를 이루고 있는 탓에 서재가 어지러웠기 때문이다. 집안 어디에나 책이 널려 있었다. 벽난로 선반을 비롯한 모든 선반은 말할 것도 없고 창턱이나 의자 위 등에 비딱하게 기울어진 채로 책들이 쌓여 있었다. 가끔씩 털이개로 책의 먼지를 털려고 하면 슈바이처가 "책을 건드려서는 안 됩니다"라고 꼭 한마디 했다고 한다. 그래서 함부로 털이개도 댈 수 없는 처지였다.
"이 바닥에 쌓여 있는 책더미 하나하나가 제가 지금 쓰고 있는 논문의 한 장 에 해당됩니다. 그러므로 다 읽고 논문을 끝낼 때까지는 고스란히 그대로 둬야 합니다." 책상 위에는 슈바이처 자신이 쓴 자잘하고 예쁜 원고 뭉치가 놓여 있었으며 피아노 위에도 이와 유사하게 공부와 관련된 자료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문제의 가정부는 매일매일 원고 뭉치에 쫓겨다니다시피 방에서 피해 나와야 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슈바이처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있었지만, 본인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것은 본인이 아무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일생을 고통받고 있는 다름 사람들을 위해서 희생해야 한다고 단단히 마음먹고 있었다. 즉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그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일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학생 시절에 친구들과 함께 가난한 가정을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원조한 일이 있었는데, 그 모임의 멤버 중 이목구비가 반듯하게 아름다우며 머리가 좋아보이는 검은 눈동자의 아가씨가 있었다. 헬레네 브레슬라우라는 이름의 처녀로 슈바이처가 교수로 있는 대학의 교수의 딸이었다. 그녀는 후에 슈바이처의 인품과 인격에 매료되어 아프리카 구호 사업에 따라가겠다고 자청하고 나서, 마침내 1912년 그가 37세 때(즉 아프리카로 떠나기 1년 전) 두 사람은 결혼하게 되었다.
아프리카 구호 사업에서 그녀는 아내인 동시에 병원의 부원장 겸 간호사로 남편을 적극적으로 돕는다. 만약 그녀가 아니었더라면 슈바이처의 아프리카에서의 성과도 그렇게 크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가 82세가 될 때까지(1957년에 사망) 약 20년에 걸친 온갖 고생과 시련이 시작된 셈이다.
한편, 사감 시절의 어느 날 슈바이처는 손님이 와서 잊고 두고 간 녹색 표지의 소책자를 보게 되어, 콩고 지방의 늪지대에 살이 문드러진 나병 환자들이 부락에서 쫓겨나고 있다는 내용의 글을 읽게 되었다. 그리하여 고생하고 괴로워하고 있는 그들을 돕지 않는다면, 죄를 짓는 것이라고 판단하기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나는 의사가 되어 의술로서 그들을 직접 도와줄 수밖에 없다. 어서 의술을 익혀 의사가 되어야지!'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하고 찾아다니던 단계는 이제 끝났다고 다짐했다. 이렇게 되어 교수요, 목사요, 이름 있는 음악가가 다시금 의학생이 되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교수가 다시 학생으로
우선 성 토마스 신학교 사감직을 사임하겠다는 편지와 친구들에게 자기 결심을 알리는 내용의 편지, 그리고 비도르 선생과 부모 앞으로 보내는 편지를 각각 적어 우체통에 넣었다.비도르 선생하고는 끝가지 이 문제를 놓고 토론을 했으며,
부친은 역정까지 내며 다음과 같이 반대했다.
"너는 모르느냐? 거기가 백인들에게는 얼마나 고약한 땅인지, 적도에서 60킬로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으며 일사병에다 호우에다 열사와 같은 더위에다,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 아냐! 세계에서 건강에 제일 나쁜 고장이란 말야."
"그러니까 더욱더 의사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슈바이처가 고집을 꺾지 않고 주장했다.
비도르 선생과의 토론에서는,
"이 일은 제가 어떤 일이 있어도 꼭 해야 할 일입니다"라고 단정적으로 선언하듯이 못을 박았다.
"하지만 자네의 재능과 학문을 전부 내동댕이치고 야만인과 생활하기 위해 가다니! 내가 생각하기에는 마치 위대한 장군이 소총을 들고 제 1선에 뛰어드는 것 처럼 어리석게만 보이네."
비도르 선생은 이렇게 말하며 못내 아쉬워했다.
"그리고 목사로서도 그곳에 갈 수 있지 않은가?"고 비도르 선생이 말을 보탰다.
"그곳에는 목사보다 의사가 더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설교만으로 그쳐서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직접 그들의 병을 고쳐 주고 곪은 곳을 도려내어 치료해 줘야 합니다."
한편 스타라스부르 대학의 의학부장은 슈바이처가 학생으로 등록하겠다고 연구실을 찾아간 당초에는 통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을 정도였다. 그러나 신념과 사명감과 의지로 불타는 그의 행동을 아무도 꺾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되어 10월 말의 어느 날 아침 이미 30세가 된 슈바이처는 안개 낀 길을 지나 처음으로 해부학 강의를 들으러 갔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니콜라스 교회에서 일요일마다 설교를 했으며 대학에서도 강의를 계속했다. 성 토마스 사감직을 그만두었을 때는 12년간 정들었던 곳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여러 가지고 착잡했다. 학생들도 이제까지 제일 인기가 있었던 사감을 잃는다는 마음에 우울해했다. 그리하여 그곳 기숙사에서 살고 있던 루터 교회의 회장이 자신의 거처에서 방 네 개를 제공해 주었다. 이사 때는 제자들이 짐을 옮기고 가구 등을 챙겨 주었다.
슈바이처는 이곳에서 5년 동안 괴로운 생활을 보내게 된다. 처음 2년이 지나자 해부학, 생리학, 동물학, 화학을 포함해서 물리학 자격 시험에 합격해야 했다. 그런데 나이 많은 할머니 가정부의 고민이 컸다. 아무리 일찍 일어나서 아침밥을 차려 가져가도 슈바이처는 언제나 이미 일어나 두툼한 의학 교과서와 씨름하고 있거나 현미경을 들여다보고 있거나, 아니면 뭔가를 노트에 기록하고 있었다. 한잠도 자지 않고 밤을 새워 공부를 해서 눈이 벌겋게 충혈된 적도 많았다.
가정부가 뭐라고 걱정하는 말을 해도 그저 "고맙소" 하고 한마디 할 뿐 여전히 하던 일을 계속했다. 한편 의학부의 젊은 학생들은 교수와 나란히 앉아 공부하는 것이 쑥스러웠으며 또한 겁을 먹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슈바이처가 강의실로 들어오면 나누던 대화도 뚝 중단하고 행동 또한 조심스러워졌다. 그렇지만 슈바이처가 대범하게 자기들을 대해 주자 차차 친근감을 느끼게 되었으며 서로 허물없이 대화를 주고받게 되었다.
슈바이처는 동시에 바르셀로나라든가 파리의 음악가 그룹의 연주회에 출연해 그럭저럭 학비를 벌었다. 공연이 끝나면 즉시 스트라스부르 행 밤차로 돌아왔다. 그는 열차 안에서도 그대로 쉬는 일이 없었다. 열차의 진동과 소리에도 아랑곳 없이 출판사에서 보내온 교정쇄를 훑어보는가 하면 바흐 전집의 해설을 담당했으며 혹은 설교의 줄거리를 메모하기도 했다.
1911년에는 뮌헨에서의 연주회 출연료로 수업료로 수업료를 지불할 수가 있었으며 최종 시험을 받을 절차를 끝냈다. 그는 32세 때 의학부의 전과정에 합격했던 것이다. 마침내 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것이다.
랑바레네 구호 사업 추진
슈바이처가 아프리카에서 구호 사업을 벌인 곳은 프랑스령 아프리카를 지나 기니 만으로 흘러드는 오고에 강가의 랑바레네라는 곳이었다. 슈바이처는 랑바레네에서 할 일을 결정하고 점검하는 한편 파리의 병원에서 현대 의학을 공부하며 실전에 대비한 경험을 쌓았다.
그러면서 그곳에서 일을 하기 위한 기금을 모금했다. 스트라스부르 대학의 교수들이 자진해서 모금에 협조해 주었으며, 성 니콜라스 교회에서도 모금을 해 주었다. 그런가 하면 파리의 바흐 합창단에서 모금을 위한 특별 연주회를 개최해 도와주었다.
1912년 6월 18일, 슈바이처는 마침내 헬레네 브레슬라우와 결혼했으며 자기 사업의 평생의 동반자를 얻게 되었다. 그녀는 슈바이처의 평생의 소원을 동시에 자기 소원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아프리카로 가서 그를 돕기 위해 그 동안 간호사 훈련을 받고 있었다.
마침내 1913년 슈바이처는 모친과 누이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열차로 퀸스바흐를 떠났다. 두 내외가 열차에 올라 손을 흔들자 플랫홈에 모여 있던 가족과 친지들이 손을 흔들어 배웅했다. 열차가 점점 속도를 내기 시작하자 배웅 나온 사람들의 모습이 점점 더 작아지며 나중에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교회의 뾰족탑도 나무 사이로 숨어 버렸다.
배는 아프리카를 향해 출발하기 위해 닻을 올리고 파도를 가르며 남쪽을 향해 미끄러져 나갔다. 오랜 항해를 거쳐 슈바이처 일행이 탄 배가 마침내 세네갈의 다카르에 입항했다. 드디어 아프리카 대륙에 첫발을 내린 것이다. 4월 14일 월요일, 배는 기니 만의 로페스 곶에 닻을 내렸다. 여기서 다시 오고에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중기선으로 바꿔 타야 했다.
오고에 강은 길이가 1,300킬로미터나 되는 큰 강으로, 콩고 강 북쪽에 거의 나란히 흐르고 있었다. 하류에서의 강폭이 1킬로미터에서 2킬로미터 가량 되었다. 하류 일대에는 물과 정글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슈바이처 부부가 원생림 속을 헤쳐 랑바레네에 도착할 때까지 꼬박 이틀이 걸렸다.
땀 때문에 옷이 몸에 착 달라붙었다. 밤이 되어도 낮과 마찬가지로 조금도 서늘하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랑바레네 마을에 도착한 부부는 전도 본부의 전도사 한 명의 마중을 받고, 금방이라도 뒤집힐 것 같은 통나무 배를 타고 랑바레네 전도 본부에 도착했다. 저녁 6시가 되자 캄캄한 밤으로 돌변했다. 슈바이처 부부는 그렇게 아프리카에서의 첫 밤을 지내게 되었다.
의사가 그 곳에 왔다는 소문이 퍼지자 약과 기구 등도 채 도착하기 전에 이미 집 주위에 병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슈바이처는 그대로 환자들을 쫓아 보낼 수가 없었다. 약도, 이렇다 할 설비도 아직 없지만 한 차례 진찰을 하고 가능한 한 손을 써 주었다. 매일 아침 베란다에는 30~40명의 병자들이 슈바이처를 기다릴 정도였다.
숲의 훨씬 안쪽에 살고 있는 부족들은 먹지를 못해 몸이 온통 일그러져 있었으며, 기근이 심한 지역에서 온 아이들은 손톱으로 흙을 긁어모아 입에 틀어 넣고 있기도 했다. 이 근방 수백 킬로미터 주위에서 오직 슈바이처만이 그들을 구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약품이나 기구를 보관할 곳도 없었으며 환자들을 입원시킬 곳도 없었다. 그리하여 궁여지책으로 헐어빠진 닭장을 찾아내어, 이를 수리해 병실로 사용했다. 옆에서 이것저것 도와주는 부인의 힘이 큰 보탬이 되었다.
열대의 원시림에서는 항상 침착하지 않으면 안된다. 표범이 언제 습격해 올지 모르며 풀섶에는 독사가 우글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강의 모래밭에서는 악어를 밟을 위험도 있다. 모기는 학질을 옮기며, 이동 개미떼의 습격을 받으면 닭 정도는 몇 분 안에 흔적도 없이 먹히고 마는 것이다.
우기에는 1주일에 4일 동안이나 공격을 감행해 오는 것이 이동 개미였다. 그런 혹독한 환경 속에서도, 이별 기념으로 파리의 바흐 협회에서 보내 준 멋진 피아노를 랑바레네까지 운반해 온 것이 큰 위안이 되었다. 파이프 오르간과 마찬가지로 페달이 달려 있는 훌륭한 악기였다. 그날 밤부터 매일 밤 아름다운 피아노 소리가 숲속에 울려퍼지게 되었다.
원시림 속의 간이 병원은 그 시설면에서 조금씩 개선되어 갔다. 먹을 것까지 병원에서 배급해 줘야 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런가하면 바르라고 준 약을 먹어 버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여러 차례 나누어 먹어야 될 약을 통째로 마셔 버리는 사람도 있었다.
환자들은 또한 의술을 일종의 마술로 알고 있었으며 슈바이처를 주술사라고 불렀다. 특히 마취 용법을 신기하게 여겼다. 산 사람을 죽였다가 다시 살려낸다는 점에서였다. 그로부터 9개월 동안 진료를 하는 등 손을 쓴 환자의 수가 2,000명에 이르렀다. 수면병, 나병, 학질, 열대성 이질 및 뼈나 관절의 질환 각종의 병에 걸쳐 있었다.
생의 외경
제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그곳을 항해하고 있던 증기선까지 프랑스 식민지 주둔군이 인수해 가 버렸다. 그러고 나서 이내 식민지 주둔군 병사들이 슈바이처의 집으로 찾아왔다. 지휘 장교가 말했다.
"선생님은 독일령 알자스 출신이므로 우리하고는 적의 관계입니다. 당신들이 이곳에 있는 것은 상관이 없습니다만. 구금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해 주십시오." 슈바이처 부부는 순순히 명령에 따르기로 했지만, 환자들이 들고 일어날 기세를 보였다. "이분은 우리의 의사 선생님입니다. 이분을 우리한테서 떼어놓을 수는 절대로 없습니다!" 슈바이처가 그들을 달래지 않았던들 돌팔매 세례를 퍼부었을 판국이었다.
그렇지만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 동안 걱정거리가 늘어났다. 약과 붕대 등의 분량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쌀도 저장분이 하루가 다르게 줄어들었다. 서로 죽이고 죽고 하는 세상의 끔직한 상황에서 그는 어느 날 느닷없이, 생의 외경이라는 말이 머리에 떠올랐다.
생의 외경! 생명이란 그 자체가 신성한 거이므로 그 생명을 소중히 키우는 것이 우리의 의무다. 그렇다면 우리는 절대로 죽여서는 안되는 것이다. 때로는 죽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도 있다. 수면병의 병원균이 발견되면 우리는 환자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그 균을 죽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그러나 우리는 결코 아무런 이유도 없이 죽여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농부는 소를 기르기 위해서 목초지에 피어 있는 숱한 꽃을 베는 경우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농부는 돌아오는 길에 심심풀이로 단 한 그루의 꽃이라도 꺾어서는 안된다. 생에 있어서의 이와 같은 진리를 터득했던 것이다.
인간은 길을 걸을 때에도 작은 벌레를 밟아 죽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이치였다. 여름밤에 불빛 밑에서 일할 경우 나방이 날아와 날개를 태워서 책상 위에 떨어지는 것을 보기보다는 창문을 닫고 무더운 공기를 마시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날 부터 슈바이처는 이런 생각을 한 권의 책에 담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슈바이처는 앞으로 사람들에게 생의 외경을 가르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1917년 9월이 되자 느닷없이 그들 부부의 단조로운 생활을 뒤집어엎는 일이 닥쳐왔다. 다음 배로 독일인과 알자스인들과 함께 포로 수용소로 들어가라는 명령이었다. 그리하여 짐을 꾸리고 막 배를 오르려 할 때었다. 심부름꾼이 그 곳으로 달려왔다. 급한 환자가 찾아왔다는 것이었다. 진찰을 해 보니 탈장 환자였다. "수술을 해야 해, 수술 준비를 하도록!" 슈바이처는 급히 챙겨 두었던 짐을 풀고 기구를 꺼내어 그 자리에서 응급 수술을 해, 환자가 목숨을 되찾은 예도 있었다.
그들은 이윽고 보르도의 임시 수용소에 3주일 동안 수용된 다음, 피레네 산 속의 가레종이라는 곳으로 보내졌다. 그리하여 그곳 사원에 수용되었다. 점호가 시작되었다. 주위에는 독일 사람과 오스트리아 사람이 있었다. 학자, 예술가, 식당 종업원, 사제도 있었다. '여기서도 공부를 할 수 있을 것 같군. 책을 펼치지 않고서도 여기 있는 사람들한테서 배울 것이 얼마든지 있겠군!'
이 수용소에서는 의사라고는 슈바이처 밖에 없었으므로 그들을 진찰하면서 얼마든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은행의 업무를 시작으로 건축술에 대한 것을 비롯해 농사 짓는 일, 공학에 대한 기술 등에 대해 자세히 들을 수가 있었다. 그는 인생의 도처를 학습의 도장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며, 한 가지라도 더 배우고자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파이프 오르간 연습도 쉬지 않고 계속했다. 실제 파이프 오르간이 그런 수용소에 있을 리 없었다. 그는 의자에 않아 책상에 양손을 올려놓고 실제로 오르간을 치는 것처럼 연습을 했던 것이다. 실제로 치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게 슈바이처의 태도는 진지했다.
1918년 봄 슈바이처 부부가 다른 수용소로 옮겨졌다. 수용소 소장도 그들을 잡아 두고 싶어했지만, 결국 두 사람은 알자스인만을 수용하는 프로방스의 생레미 수용소로 가게 되었다. 그곳은 반 고흐가 정신병을 앓아 수용된 병원이기도 했다. 유명한 '테이블', '해바라기', '쇠난로' 등의 그림이 이곳에서 그려졌던 것이다. 반 고흐가 불치의 정신병으로 시달린 것처럼, 당시 슈바이처도 이질을 앓고 난 끝에 쇠약해져서 좀처럼 회복이 되지 않았으며, 부인도 지친 데다 임신까지 하고 있어 더욱 약해 보였다.
이윽고 7월이 되어 슈바이처를 비롯한 포로들은 독일에 수용되어 있는 프랑스인과 맞바꾸어져 스위스를 통해 고국으로 송환되었다. 일행 중에 다리가 좋지 않은 노인 하나가 있었다. 그는 옛날에 슈바이처가 자신을 도와준 일을 기억하고는 무거운 짐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거들어 주겠다고 나섰다. 노인은 가방 두 개를 뺏어 들고는 절룩거리면서 타는 듯한 선로 사이의 자갈 위를 걷기 시작했다. 슈바이처의 가슴은 벅찬 감격으로 두근거리기까지 했다.
'앞으로는 무거운 짐을 가진 사람을 늘 살펴, 반드시 거들어 줘야지.' 슈바이처는 그 후 이 맹세를 꼭 지켰다고 한다.
그가 어렵게 해낸 주요 업적을 대충 더듬어 보자.
1918년 42세 때, 포로 교환으로 고향으로 돌아왔으며, 그 다음해 생일날에는 첫딸이 출생했다. 그 뒤 그는 계속 쉬지 않고 20년부터 24년까지 스웨덴, 덴마크, 영국, 체코슬로바키아 등지에서 연주회와 강연회를 개최해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이어 다음해인 1923년(48세 때)에는 "문화의 철학"을 출판해 내다. 이어 1924년(49세 때)에는 다시 아프리카로 가서 낡고 부서진 병원을 재건하는 데 노력을 집중했다. 그 다음 해에 그가 임종도 지키지 못한 가운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그는 랑바레네 위쪽 둔덕에 새로 병원을 짓기로 결심해 그 다음해에는 2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새 병원을 완성시켰다. 그해에 "랑바레네 통신"이란 저서를 출간했다.
일시 귀국해 1932년(57세 때)에는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괴테 100주년 기념회에서 괴테에 대해 강연을 했고, 이어 "괴테 기념 강연"을 출판했다. 1933년에는 다시 아프리카로 갔다가, 다음해에 다시 일시 귀국해 옥스퍼드 대학에서 "현대 문명과 종료"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 다음 해에는 다시 아프리카로 2월에 갔다가 10월에 귀국하여 영국으로 여행했다. 이때 그가 연주한 바흐의 곡을 음반으로 취입했다.
1937년 2월(62세 때)에 다시 아프리가 랑바레네로 가서 병원을 증축했다. 1939년 1월에 제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해 아프리카 원시림 속에서 두 정부 사이에 내전이 격렬하게 벌어졌지만 양쪽 군이 다같이 슈바이처의 병원에 대해서는 조금도 피해를 주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그렇지만 병원의 조수등 의료원이 징집되어 끌려 나가는 바람에 의료 업무에 위기가 초래되어 곤란을 겪게 되었다.
1941년 8월에는 여러 어려움을 무릅쓰고 부인 헬레네가 랑바레네로 다시 와서 그를 돕기 시작했다.
1952년에는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지만 수여식에는 참석하지 않고, 간단히 '감사하다'는 서신만 보냈다. 슈바이처는 상금으로 주어진 3만 4,000달러를 나병 환자 병동을 짓는 데 사용했다. 1950년에 약 50명에 불과했던 환자의 수가 1951년에 100명, 1952년에 200명, 1953년에는 300명 가까이로 불어났기 때문이었다. 당시 79세가 된 그는 커다란 오두막 병동 일곱 채를 짓기 위해 손수 구덩이를 파서 기둥을 세우고 그 자리에 콘크리트를 개어 넣는 등 왕성하게 일했다. 이 병동은 입원실은 물론이고 취사장까지 딸려 있는 훌륭한 것이었다. 그는 늘 이렇게 말했다.
"목숨이 붙어 있는 날까지 열심히 일을 해야 한다."
친구들의 귀국하라는 독촉이 성화 같았지만, "이 고장 사람들에게는 내가 필요합니다." 면서 완강히 거절했다. 하긴 그런 보람도 있었다. 크리스마스와 박사의 생일에는 나병 환자들의 합창대가 축하의 노래를 불러 주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일요일 오후 나병 환자인 노인이 어린이 나병 환자 한 무리를 대동하고 박사네 베란다로 찾아왔다. 아이들은 나무 그늘에서 부끄러운 듯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무엇인가 아쉬운 것이 있어서 온 것인가 싶어 물었더니, "우리는 선생님께 감사하다는 마음을 전하기 위해서 왔을 뿐이에요" 하고 대답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는지, 어느 날 이런 말을 했다. "내가 만약 이곳에서 죽는다면, 이곳 아내의 무덤 옆에 나란히 묻어 주구려."
그는 평생에 자기가 원한 것을 모두 얻었지만 동시에 그것들을 다 남에게 돌려주었다. 그는 1965년 90세 때 랑바레네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하여 헬레네 부인(1957년 6월 사망)의 무덤 옆에 나란히 묻혔다. 장례식이 끝나자 흑인의 아버지 슈바이처를 그리워하는 그곳 주민들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무덤으로 다가가 기도하며 한없이 울부짖었다.
이원용, 을유문화사, 1996
세계를 움직인 12인의 천재들
Albert Schweizer 1875 ~1965
인류애의 산증인 알베르트 슈바이처
슈바이처 박사의 오르간 연주 4곡 연속듣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