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시밀리안 신부는 기다리고 있었다.
신부는 오래 전부터 이번 전쟁에서 살아 남을 수 없을 것을 알고 있었다. 신부가 많은 증인들 앞에서 몇 번이나 예언했던 '피의 시련'이 이제 다가온 것이다.
1941년 2월 17일 검은 색 자동차가 수도원 정문 앞에서 멈추었다. 게슈타포의 표시를 사람들은 잘 알고 있었다. 수사 한 사람이 원장 신부에게 달려가 위급함을 알렸다.
"그래요?"
신부는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불안한 빛이 역력했으나 곧 침착을 되찾았다.
"좋습니다. 내가 가지요. 마리아!"
영구차 처럼 느껴지는 검은 색 자동차에 타기 전에 막시밀리안 신부는 마지막으로 원죄 없으신 성모의 마을과 사랑하던 수사들을 둘러보았다. 이제 그 수가 얼마되지 않는 이 수사들은 어쩔 줄을 몰라 한 곳에 모여 있을 뿐이었다. 신부는 마음 속으로 그들을 축복하고 성모님께 빌었다.
"제가 떠나면 제가 하던 일을 하실 분은 어머님뿐입니다. 어머니의 마을, 어머니의 모든 양들, 어머니의 어린 양들, 그리고 여기 있을지도 모를 저 불쌍한 염소들, 그것들까지도 모두 지켜주십시오. 모두 어머님께 맡겨 드립니다."
차가 떠났다. 그 차가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신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다른 네 사람의 신부들과 함께 체포되었지만 그 중 두 사람만이 살아서 돌아왔다
...
그것은 1941년 7월 말이었다.
막시밀리안 신부가 있던 제 14호 감방에서 한 사람이 없어졌다. 새로운 탈출자가 생겼다! 억류인들은 포로 한 사람이 도망치면 같은 감방에 있던 20명을 아사형에 처한다는 수용소장 프리치의 경고를 생각하고 몸을 떨었다.
그날 밤 그 감방에서는 누구 하나 잠을 청하지 못했다. 죽음과 같은 공포가 이 불행한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교묘하고 잔혹한 고문에 시달려 차라리 죽음으로써 이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어했던 그들이었건만...
죽는 건 좋다. 그러나 어떤 죽음보다 가장 잔혹한 이런 죽음만은 도저히 받을 수 없다.
사형 집행대의 총탄에 맞아 쓰러지는 것- 군인답게 죽는 것은 이들 용감한 사람들에게는 조금도 두려울 것이 없다. 그들은 조금도 떨지 않고 형장으로 걸어 나갈 수 있다. 그러나 주림으로 창자가 말라 붙게 하고, 갈증으로 핏줄을 불붙게 하며 날뛰게 하는 이 말 못할 고통 속에서 언제 끝날지 모르는 나날을 괴로뤄하며 지낸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피가 얼어붙고, 이름도 모를 공포에 휩싸이는 것이다.
...
수용소 안에는 '죽음의 감방' 에 관한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나돌고 있었다. 이 공포의 장소에서는 밤이면 이따금 맹수의 부르짖음 같은 소리가 울려 퍼진다. 아사형에 처해진 사람들에게서는 인간다운 점이란 찾아 볼 수 없어 간수들 마져 무서워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굶주림의 고통 때문만이 아니라 목마름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간디도 단식 투쟁을 하면서 물 만은 마셨다. 물만 마실 수 있으면! 굶어 죽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다. 견딜 수 없는 고통은 바로 목마름의 고통인 것이다.
...
수용소장 프리치는 거창한 제스처를 즐기는 사람이었다. 그는 또한 굉장한 교육적인 식견을 지니고 있다고 자부했다. 본때를 보여 줄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교활한 맹수 조련사처럼 적당한 시기를 기다렸다.
야간 점호 시간이 되었다. 밟혀 다져진 넓은 벌판에는 자기 일과를 마치고 돌아온 다른 감방 죄수들이 정렬했다. 그들의 눈이 모두 고문 당하고 있는 14호 감방 동료들을 향하면서 그 수 없이 많은 입술을 소리 없이 움직여 그들을 위해 기도했다. 늘어선 열을 따라 거의 느낄 수 있을 만큼 공포가 전해졌다.
프리치 소장은 천천히 돌아다니면서 보고를 받았다. 그러더니 14호 감방수들 앞에서 돌연 멈추었다. 그의 머리는 불독의 머리 같았다. 그는 분명 희생자들의 공포를 즐겁게 음미하는 것이다. 파리 소리도 들릴 만한 침묵이 넘쳐흘렀다.
갑자기 그는 말하기 시작했다. 발작적인 그의 말들이 한 마디 한 마디 죽음 같은 침묵 속에 떨어졌다. "도망친 놈이 안 잡혔다. 너희 중 10명이 저 아사 감방에서 굶어 죽어야한다. 이 다음 번에는 20명을 보낼테다."
그는 첫째 줄로 다가가더니 한 사람씩 얼굴을 들여다보며 무언가 생각하는 듯했다. 그리고는 서투른 폴란드어로 말했다.
"입을 벌려 혀를 내밀어라. 이빨을 보여!"
희생자들은 도살장에 끌려가는동물처럼 가슴을 팔딱이며, 괴상한 모습을 한 채 소장을 쳐다봤다. 소장은 그들의 이빨을 자세히 관찰하는 척했다.
이것도 머리를 짜서 생각해 낸 잔인한 고문의 한 방법이었던가? 아니면 마시장(馬市場)에서 하듯이 건강 조사를 했던 것일까? 가장 튼튼한 자를 뽑으려는 것일까? 독일의 강제 수용소에서는 원칙적으로 건강이 좋은 사람이 벌을 덜 받는다. 그러나 프리치는 사디스트였고 변덕쟁이였다. 이 망령과 같은 사람들 사이를 죽음의 사자처럼 돌아다니는 일이 그에게는 즐거웠던 것이다.
"너"
마침내 그는 손을 들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의 보좌관 팔리치가 즉시 그 번호를 수형자 명부에 기입했다. 아우츠슈비츠에서 인간은 한 개의 번호에 불과했다. 지적당한 사람은 새하얗게 질린 채 열에서 나왔다. 물을 끼얹은 듯한 침묵 속에서 거친 숨소리만이 한숨인 양 들려온다.
"너, 너, 그리고 너!"
프리치는 계속해서 지적한다. 재미있나보다.
10명이 되었다. 10명이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들 중 한 사람이 열에서 나오며 울부짖었다.
"아, 불쌍한 마누라와 아이들을 이제 다시 못 보게 되었구나!"
"신발을 벗어!"
팔리치가 명령했다.
사형수들은 맨발로 형장에 가게 돼 있다.
나막신을 벗어던지는 소리 속에 한 사형수의 흐느끼는 소리가 섞여 들렸다.
부인과 아이들이 불쌍하다고 부르짖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
"좌로 돌앗!"
눈 뜨고는 못 볼 이 참혹한 광경에 많은 사람들은 몸서리쳤다.
왼쪽에는 저 무시무시한 13호 감방이 있다. 검은 벽의 사형 집행실, 사형대,
그리고 '아사감방'
...
갑자기 전혀 생각지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한 사람의 포로가 놀라고 있는 동료들을 헤치며 열 밖으로 걸어 나오는 것이었다.
감히 그런 짓을 하다니! ...
머리가 약간 옆으로 굽은 그 사람은 그의 큰 눈으로 당황해하는 프리치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수근거리는 소리가 물결 퍼지듯이 이 열에서 저 열로 서서히 전해져나갔다.
"막시밀리안 신부다! 콜베 신부다!"
"정지! 무슨 일이야? 이 폴란드의 돼지 새끼야!"
소장은 권총을 쥐더니 한 걸음 물러서며 외쳤다.
막시밀리안 신부는 소장 앞에 섰다. 아주 침착했다. 미소까지 띤 것 같았다. 신부는 바로 옆의 사람에게만 들릴 것 같은 낮은 소리로 말했다.
"저 사형수 중의 한 사람 대신 내가 죽겠소."
프리치는 망연히 신부를 바라보았다. 꿈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는 뜻밖의 소리를 들은 것이다. 어떠한 반대도 허용하지 않는 그, 자기의 결정을 결코 바꾸지 않는 그, 반항하는 자는 권총 한 발로 간단히 쓰러뜨리는 그, 그가 지금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의 그 위압적인 맑은 시선을 받고 어쩔 줄 몰라 하고 서 있는 것이다. 이제 명령을 내리는 사람은 막시밀리안 신부 쪽이었다.
"도대체 왜 그래?"
소장은 얼빠진 사람처럼 물었다.
단순한 호기심에서 묻는 것일까? 생각을 가다듬을 시간을 얻자는 것일까?
흡혈귀 프리치가 포로와 문답하는 것이다!
막시밀리안 신부는 훌륭한 심리학자였다. 형리가 단숨에 패배하도록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신부는 잘 알고 있었다. 영웅적인 태도를 보였다가는 일을 그르칠지 모른다. 나치스의 불문율인 '병든 자와 약한 자들은 처치해 버려야 한다.'라는 조항을 내세우는 게 더 좋겠다.
신부는 대답했다.
"나는 늙었고 아무짝에도 못 쓸 사람입니다. 살아 있어도 아무것도 못 하게 될 겁니다."
"누구 대신에 죽겠다는 거냐?"
'저 사람, 부인과 아이들을 가진 사람 대신입니다."
신부는 슬피 울던 사람인 프란치스코 가조프니체크 중사를 가리켰다. 아주 가까이 있던 사람들을 제외하고 점호를 받으러 모였던 대부분의 포로들은 이 문답을 듣지 못했으므로 아무것도 몰랐다. 그들의 놀라움은 컸으나 그것은 프리치가 포로와 이야기하는 것을 지금까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놀랐던 것에 불과했다.
프리치의 호기심은 한번 더 그의 잔인성을 억누를 수 있었다. 그는 알고 싶었다.
"너는 누구냐?"
"천주교 사제요."
그는 사제로서 죽을 것이고, 사제이기 때문에 죽으려고 하는 것이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흡혈귀 프리치의 머리와 가슴 속에 무슨 생각과 느낌이 떠올랐을까? 이 일은 자기로서는 도무지 어렴풋이나마 이해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느꼈을까? 하여튼 그는 감히 "안 된다." 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막시밀리안 신부는 기다렸다. 그의 얼굴과 수염은 한 없이 젊어 보였고 화사해 보였다. 신부는 프리치를 쳐다보고 있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멀리 붉은 빛과 황금 빛으로 뒤덮여 넘어가는 태양을 향하고 있었다. 신부는 이 장엄한 평화 속에서 미사를 올리고 있는 듯했다. 점호 중에 이렇게 오랫동안 침묵이 계속된 적은 없었다.
마침내 프리치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
"좋다, 함께 가라."
그는 욕설도 상소리도 하지 않았다. 그때부터 프리치는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앞으로 갓!"
사형수들은 맨발에 셔츠 바람으로 죽음의 감방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모든 사람들의 눈이 그 뒤를 따랐다. 막시밀리안 신부는 뒤에서 양 떼를 모는 목자처럼 맨 끝에 따라갔다. 머리를 약간 옆으로 기울인 채 가슴 속으로는 천국을 그리면서...
"나의 모후, 나의 주님, 나의 어머니, 오 원죄 없으신 동정녀여, 당신은 약속을 지키시는 분입니다. 나는 지금 이 시간을 위해 태어났습니다."
그들은 걸어가고 있고 밤은 찾아왔다. 이제 그들은 해를 등지고 밤 속으로 들어간다.
*** 聖 막시밀리안 콜베 연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