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그리워 당신을 품에 안았더니 당신의 심장은 나의 오른 쪽 가슴에서 뛰고 끝내 심장을 포갤 수 없는 우리 선천성 그리움이여 하늘과 땅 사이를 날아오르는 새떼여 내리치는 번개여
<함민복의 ‘선천성 그리움’>
함민복의 시는 자본주의 속에서 피어난 연꽃이다.
이 말을 몇 번이나 곱씹어 보았습니다. 함민복 시인에게 이러한 말을 헌정한 사람은 그의 시를 잘 이해하고 있을 뿐 아니라 아마 가까운 지인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본주의의 핵심은 개인의 이기심에 있습니다. 개인의 이기심을 부채질하여 스스로 땀을 흘리며 일을 하게하고 성취하게 하는 것이 자본주의지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강한 자는 많은 것을 가질 수 있습니다. 약삭빠른 자가 먼저 손에 넣을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자유’라는 간판을 들었으나 혹독한 노동력과 생산성을 만들어낸 강자가 살아남기에 적당한 체제지요. 그래서 자본주의는 강자의 기쁨이지요. 모든 것은 경쟁이라는 인생달리기에서 강한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구조를 가졌거든요.
자본주의는 욕만 하기에는 묘한 매력을 가졌습니다. 민주주의란 그릇에 담겨 있다는 것이지요. 자유라는 아득한 그리움으로 얼굴을 내밀고 있어 버리기에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래서 미워하기엔 애증이 함께하는 것을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약한 자에게는 한 없이 가혹한 체제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체제 속에서 여린 시인이란 존재는 상처를 받고 아파하는 새지요. 새장을 나와 날 수 있으나 쉴 집이 없습니다. 어딜 가도 경쟁관계에 있는 사회란 틀에서는 견디기 힘들어 합니다.
나이 들어서도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사람이 있다면 철이 들지 않은 사람이지요. 나이 들어서도 글자를 가지고 노는 사람도 철이 들지 않은 사람일 수 있습니다. 거대담론을 가지고 철학이나 사상, 아니면 새로운 진리를 개발해 내는 것도 아닌 이 세상에 떠도는 자음과 모음을 가지고 글자 맞추기로 세상을 노래하는 사람은 분명 철이 들지 않았지요.
‘미학’이란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거든요. 돈이 되지 않는 언어미학이란 더 말할 것도 없지요. 시는 언어로 만든 그림인데, 상상력을 통해서 그려지지요. 순수한 자가 만들어내는 세계는 우화일 수도 있지만 동화 같은 세상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사람에 대해서 귀를 세우고 삶의 맥박소리를 듣지요. 세상에 대해서 귀를 세우고 변하는 소리를 듣지요. 바람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물이 흘러가는 소리를 듣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비가 내리는 소리를 듣기도 합니다. 바람은 지친 생명에게 다가가 어깨를 다독거리며 소곤거립니다. 물은 바다로 흘러가지만 그들은 애초에 이 세상에 찾아올 때는 비로 내려왔지요. 그래서 강물은 바다로 흘러가지만 하늘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비가 내려 바다로 가는 것보다 훨씬 많은 비들이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실이지요. 이 세상에 떨어지지 마자 증발이라는 승천과정을 통해서 다시 하늘로 올라가 구름이 되지요. 시인은 많은 사람들이 공장으로 회사로 시장으로 돈을 벌려 나간 시간에 이러한 것들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시인이 이 세상에 살아남은 것은 어쩌면 기적이지요. 아직도 철들지 않은 시인이란 존재는 꿈을 꾸는 존재거든요. 몽유병환자인지도 모릅니다.
함민복 시인에게서도 그러한 모습이 보이지요.
사람 그리워 당신을 품에 안았더니
당신의 심장은 나의 오른 쪽 가슴에서 뛰고
끝내 심장을 포갤 수 없는
우리 선천성 그리움이여
사람이, 사람이 그리운가요?
어법상 문제가 있지요. 그래도 이 말을 고집하고 싶어지네요. 사람이 사람을 그리워하나요로 고치는 것보다 저는 더 정감이 가는데, 아니라고요. 그래도 제 맘이거든요. 여행을 떠나든가 혼자서 긴 시간을 시골집에 앉아 있어보세요. 파리가 한가로운 마당을 나는 소리가 얼마가 크게 들리는가를. 잠자리가 그림자를 드리우고는 제 그림자에 취해 한참을 머무는 마당가에서 그리워지는 것은 사람이지요. 사람은 사람을 그리워하고 있었지요. 타고난 그리움이었습니다.
이 시는 이 네 줄이 전부라고 할 수 있지요. 뒷부분은 이 네 줄이 주는 의미를 받쳐주기 위한 서사지요. 상황에 대한 울림이고요. 한 생명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개인적인 일이 아니라 운명적인 일이라고 생각되거든요. 들판을 걸어가다 꽃이 피어있는 걸 보면 반갑지요. 사람도 없고 지나가는 들짐승도 드문 곳에 홀로 피어서 아름다움 그 자체로 꼿꼿이 서 있는 모습은 정말 반갑지요. 향기는 바람에 실어 보내고 자존은 올곧은 지상의 축제가 아무도 없는 들판에서 조촐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게지요. 그래서 생명들은 저마다의 기쁨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삶이 아름답고 세상이 아름다운 것은 이러한 기반 위에 있는 것이지요.
때론 거친 바람이 불지만 그것은 서로 위로해 주는 또 다른 생명이 있어 견딜만합니다. 그것이 사랑인데, 사랑은 생명이 생명을 그리워하는 아주 아름다운 현상이지요. 그곳에는 합리성이나 목적이 없습니다. 그곳이 어디냐고요, 사랑이 무르익는 생명의 낙원이지요. 진실이 무엇이냐고 따져봐야 아무 것도 남는 게 없습니다. 사랑은 과정이지요. 사랑은 과정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흐름의 증발현상 같아서 증거도 없고 흔적도 없습니다. 그럼 도대체 무엇이냐고요?
자꾸 보챌 일이 아니지요. 사랑은 ‘어떤 한 사람에게 뻥 간 기쁨’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합니다. 그럼 이 말이 정답이냐고 들이대지는 마세요. 굳이 사랑을 정의 내리려 하는 사람이 어리석다고 이 자리에서 이야기해야 합니까?
어찌 되었든 함민복 시인이 이 <선천성 그리움>이란 시에서 말한 ‘당신’이란 존재는 사랑하는 존재임에 틀림없습니다. 어쩌면 아닐지도 모릅니다. <사람 그리워 당신을 품에 안았더니> 라면서 <사람 그리워>라는 전제에서 일반론적인 명사인 그냥 ‘사람’이라고 했기 때문이지요. 그렇더라도 저는 정황상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이야기 하고 싶어집니다. 이러한 일반론적인 명사를 쓴 것은 아마 사람에 대한 그리움의 원천성을 설명하려 했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당신의 심장은 나의 오른 쪽 가슴에서 뛰고
사람이 살아있음은 심장의 고동소리에서 가장 확실하게 확인되지요. 심장은 생명의 근원입니다. 헌데 마주 안으면 서로 다른 곳에서 심장이 뛰고 있는 것이지요. 삶이 영원히 익숙해질 수 없는 것 줄은 살아보고 나서야 알게 되더군요. 끝없이 새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이 숙명이기도 하지만 주저앉는 자신을 반복적으로 일으켜 세워야 하는 것이었거든요. 그래서 위로가 필요하지요. 위로의 말보다도 사랑하는 사람을 꼭 안으면 내 심장 뛰는 소리가 상대방에게, 상대방의 심장 뛰는 소리가 내 가슴에 울리면서 ‘그대가 이 세상에 살아주어서 고마워요’라고 속삭이거든요. 헌데, 내 심장과 상대방의 심장이 다른 위치에서 뛰고 있는 것을 시인을 발견했습니다. 그만큼의 거리가 ‘그리움의 거리’인 것을 몰래 홈쳐본 것이지요. 늘 그래왔던 일이고 그러려니 한 것을 시인은 간파했습니다. 제일 먼저 사람이 왜 그리움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이유를 알아낸 것이지요.
같은 방향을 보고 걸으면 심장은 같은 방향을 가겠지만 쿵쾅쿵쾅 뛰고 있는 심장은 서로 만나지 못하지요. 늘 혼자만 뛰는 심장이 허전해 가슴을 맞대고 만나려 안았지만 만나지 못하지요. 내 가슴은 그의 빈 가슴에서 뛰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가슴은 나의 심장이 없는 쪽에서 뛰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 거리가 ‘선천성의 그리움’의 거리인데 멀게만 느껴지지요.
함민복 시인은 1988년 ‘세계의 문학’에 ‘성선설’로 등단하였고 서울예전 문예창작과를 졸업했습니다. 첫 시집 ‘우울氏의 一日’로 시작해서 ‘자본주의의 약속’을 출간했고, 1996년에는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는 시집을 출간했습니다. 1998년 문화관광부에서 주는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그에게는 이상하게도 가난이라는 말이 수식어처럼 따라다니는데 그것은 그의 시에서 만나는 편편의 글들이 그러한 가난한 삶을 그려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실제로 가난을 운명처럼 안고 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강화도 남쪽 끝자락에 사는 시인 함민복은 나이가 벌써 40대를 넘고 있습니다. 자본과 욕망의 시대에 저만치 동떨어져 살아가는 가난한 시인이지요. 가난과 질곡의 삶을 의연히 살아가고 있는 그에 대한 기사의 한 부분을 옮겨봅니다.
그는 이 자본과 욕망의 시대에 저만치 동떨어져 살아가는 빈자(貧者)였다. 이 세상 모두가, 중심을 향해 그저 앞으로만 나가고 있는 이때, 변두리 바닷가로 스스로를 자꾸 밀어내듯 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중심(中心)을 부러워하거나 미워하지 않았다. 그것은 한계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삶에 대한 선한 마음을 가진 함민복 특유의 낙관이기도 했다.
그는 그러면서도 자기 혼자 걱정 없이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인지, 미안하다고 말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인 줄 뻔히 알면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삶의 그물망을 넓혀 나가는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야말로 성자(聖者)라고 말했다.
함민복 시인은 세상을 떠나서 살지는 않았으나 자본주의의 변방에서 살고 있었고 스스로에게 자책의 채찍질을 하지는 않으면서 조용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본주의적 삶이란 돈만큼 확장된다는 것을 처절하게 체험했지만 굳이, 확장 안 시켜도 된다고 생각해요. 늘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해요.
함민복 시인의 말에는 울림이 있습니다. 가난은 죄가 아니다 다만 불편할 뿐이라는 말처럼 행동반경을 축소하면 쉽게 해결되는 것들입니다. 욕망을 절제하면 문제가 되지 않는 것들입니다. 그것을 순명으로 받아들이면 더 삶은 고요해질지도 모릅니다. 이 시대는 욕망을 절제하면 무한히 부드러워질 수 있는 시대거든요. 욕망이란 열차에 동참해서 치열하게 경쟁하느냐, 아니면 아주 편한 생을 온전한 따뜻함으로 살아낼 것이냐는 순전히 자신의 문제지요.
함민복 시인은 축소의 미덕을 받아들이기로 한 셈이지요. 밖으로의 확장을 접어두고 조용히 자본주의를 향해 무심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가지고자 했습니다. 자본주의는 ‘자본’이라는 말뜻 그대로 물질적인 재화의 확대를 바탕으로 하는 삶인데 삶의 반경을 줄여서 축소로 가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 그리 용이한 일이 아니지요.
그의 시는 말 그대로 축소된 삶의 전형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굳이 풀어쓰면 가난한 삶을 가난스럽게 그려내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함민복시인의 시 그대로가 그의 삶입니다. 지금 그가 선택한 축소된 자본주의의 본향인 초라한 함민복의 집, 강화도 남쪽 끝자락 인천 강화군 화도면 동막리에 있는 집 한 채도 이렇게 구했답니다. 서울 달동네와 친구 방을 전전하며 떠돌다 96년, 우연히 놀러 왔던 마니산이 너무 좋아 보증금 없이 월세 10만 원짜리 폐가를 빌려 둥지를 틀었다는군요. 가난을 일부러 선택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가난보다 더 중요한 것을 하고자 가난은 감수하기로 하는 것이지요.
그럼 이제 그의 가난이 배어있는 시를 하나 더 들어볼까요.
詩 한 편에 삼만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시집이 한 권 팔리면
내게 삼백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 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긍정적인 밥>
시 제목이 <긍정적인 밥>입니다.
시 한편에 3만원, 그 짤막한 글에 3만원을 준다싶으면 수지맞는 장사 같지만 내막을 들여다보면 영 실속이 없습니다. 시를 한 달에 열편 정도를 쓴다면 그래도 30만원은 되는데, 어느 시인이 10편을 한 달에 쓸 수 있는지 궁금하거든요. 무엇보다 아쉬운 건 10편을 썼다 해도 시 원고료를 주는 문예지가 거의 드물다는 것이지요.
시집을 1년에 한 권 내는 시인을 보지 못했습니다. 다작의 시인도 2년에 한 권꼴로 시집을 내지요. 서정춘 같은 시인은 평생을 통해 2권을 냈습니다. 시집 한 권에 60편에서 120편 정도의 시가 실립니다. 적게 잡아서 60편을 1년에 만들어내면 시집을 한 권 낼 수 있다는 이야기인데, 그것이 어렵다는 이야기지요. 한 달에 5편이 쉽지 않음을 눈치 챌 수 있는 게지요. 헌데 시 한 편에 3만원이거든요.
함민복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살짝 숨겨놓고 슬쩍 긍정의 힘을 빌어서야 시 한 편의 값이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라고 하는 것이지요.
전업작가가 이 땅에선 견디어 낼 수가 없습니다. 그 중에서도 전업시인은 말 할 것도 없지요. 글을 쓰는 것이 생업인 사람은 어디가 모자라거나 대단히 뚝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어려운 것임을 알게 됩니다.
지금이 2006년도이니 원고료도 조금 올라서 5만원은 주는데, 문제는 주는 곳이 거의 없다는 것이지요. 취미 삼아 글을 쓰면 그래도 까짓것하고 말면 그만인데, 함민복 시인은 다른 일이 없으니 난감한 일이겠지요. 그가 선택한 돈벌이란 것이 글공부하는 사람들을 지도하는 것인데, 말이 좋아 글을 가르치는 것이지 그것 또한 난감할 만큼 돈이 안 되거든요. 배우는 사람 몇몇이 밥 한 숟가락씩 덜어 밥 한 그릇 만드는 그, 십시일반이란 말이 있잖습니까. 그런 것이거든요. 함민복 시인은 그런 돈 안 되는 일만 골라서 살고 있는 셈이지요. 노동판에 나가면 하루 막노동비가 7만 원 정도 한다는군요. 한 달에 며칠만 일해도 꽤 쏠쏠한 돈이거든요.
그렇다면 시인은 무엇으로 먹고 살아야 하는지 난감해지지요.
방법이 그리 많지가 않습니다. 먹는 것도 줄이는 것이 있습니다. 시인에게 좋은 시 하나 만들어내는 것이 앉으나 서나 소원인데 참 어렵지요. 누웠다가 시상이 하나 떠올라 눈을 번뜩이며 적어놓고는 아침에 일어나 읽어보면 왜 그리 감상적인 어구로 쓰여져 소녀가 소년에게 보내는 연서 같기만 한지 황당한 경험을 하게 되지요. 글을 쓰는 사람이면 누구나 경험하는 바지요. 아침에 일어나서 밤에 잠들 때까지 멋진 시어 하나 얻으려는 노력이 가상해도 한 달에 마음에 드는 시 한편이 어려운 현실이고 보면 시인이란 존재는 모자라도 많이 모자란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그 어렵게 쓴 시 한편이 몇 줄밖에 안 되어서 3만원이 많다고 하면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럴 때는 쓴 소주나 한 잔 하는 게지요. 달리 풀 방도나 있습니까?
함민복 시인에 대한 일화를 적어 볼랍니다.
평소 함 시인을 아끼는 선배 소설가 김훈 씨가 책 뒷장에 한 줄 썼습니다. “나는 라면과 소시지를 장만해서 민복이네 집에 몇 번 놀러 갔었다. 부탄가스도 사다 주었다. 우리는 바닷가 개펄에 앉아서 지는 해를 바라보며 라면을 끓여서 소주를 마셨다. 나는 민복이가 우리나라의 중요한 시인이라는 것을 아는데, 민복이는 이걸 전혀 모른다.”
그런 소설가 김훈은 “가난과 불우가 그의 생애를 마구 짓밟고 지나가도 그는 몸을 다 내주면서 뒤통수를 긁고 있다. 그는 세상을 버리지 못하는 은자(隱者)이고, 숨어서 내다보는 견자(見者)이다”라는 말로 그의 인생에 대해 헌사를 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일화를 더 소개해볼까요.
1998년 문화관광부에서 주는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을 수상한 함민복 시인은 좀 섭섭했습니다. 상금도 없이 부상으로 준 커다랗고 무거운 기념품이 못마땅한 시인은 이렇게 투덜거렸습니다.
"차라리 쌀이나 한 가마니 주지"
돈을 주고 상을 사는 세상에서 상으로 쌀을 사고 싶은 것이 함민복 시인의 마음이고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절로 납니다. 가난을 미화시키기엔 삶이 그리 간단치 않습니다. 그렇다고 시인이 시를 포기하기에는 삶이 허전합니다. 어찌해야 합니까. 사람이란 이름으로 이 세상을 걷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인 줄을 알면서도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시 한 편을 써놓고 행복한 날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허전하기 이를 데 없는 언어의 성전을 짓는 그는 아파한 만큼 생의 곡절을 아름답게 만들어낼 것입니다.
그의 말들을 모아 그의 면면을 읽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충청도 태생인 그가 강화도까지 와서 둥지를 튼 것은 “우연히 놀러왔던 마니산이 너무 좋아서”라는 낭만적인 이유가 먼저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 속사정을 알면 다시 가난이란 말이 그의 수식어가 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 속사정은 일산에서 살다가 신도시가 들어서자 문산으로 갔고 그 곳 땅값이 올라 어쩔 수 없이 밀려온 현실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가 살고 있는 동막의 뻘은 무려 4㎞나 됩니다. 면적으로 보면 1800만평이니, 여의도의 3배 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 뻘에 바다가 들어찼다가 비워지는 광경은 장관이지요. 바다가 들어오면서 노을을 안고 오거나, 물길을 만들어주면서 바다가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면 넋을 놓게 됩니다. 그곳에 사는 생명들과 뻘을 그는 ‘말랑말랑한 힘’이라고 했지요. 뻘은 아무것도 안 만들고, 반죽만 개고 있다고 그는 표현했습니다. 뻘에 사는 것들이 집이 필요하면 구멍을 파고 들어갈 뿐 표면은 부드러운 수평을 유지한다고 합니다.
내 삶을 좀 더 먼 시간 밖에서 바라다보면 결국 안개에 갇혀 있는 것과 같지 않을까요. 현재란 시간의 섬이며 세월이 가는 길, 시간은 현재의 뭍인 셈이죠.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는 그의 시집처럼 그는 시간 안이나 밖에서나, 삶의 안에서나 밖에서나, 그 경계를 허무는 것은 아름다움뿐이라고 외치고 싶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 아름다움이 그에게 있어서는 시였고, 그것을 위해 가난도 감수하는 시인이 되었습니다. 함민복 시인은 삶의 변방에서 가난을 긍정으로 일으켜 세우는 시인이었습니다. 가난하지만 시는 따뜻했습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밥 한 상 같은 시를 만들어낸 가난의 힘은 아름다웠습니다. 그 힘의 발원은 긍정에서 비롯되었음을 보게 됩니다. |
내용출처 : 네이버지식인(http://kin.naver.com/open100/db_detail.php?d1id=11&dir_id=110103&eid=J4qQcbKTLTSxSPVrj9i2nYSGhwRcjG3C&qb=vLHDtby6sde4rr/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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