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

[스크랩] 스승의 날에 본 작약꽃

klgallery 2008. 5. 28. 18:48

 

♣ 2008년 5월 15일 목요일 맑음


갑갑하다. 기침과 콧물과의 전쟁을 벌이며 아픈 목 때문에

한참 엎드려 있다가 TV를 보는 둥 마는 둥 잠시 눈을 붙였다가

일어나 정신을 차리려고 목에 가그린을 채웠다가 시간이 늦어져 

주섬주섬 차려 입고 도내 사립중고교 체육대회가 열리는 오현고로 갔다.


본지 오래된 얼굴들과 인사를 하며 우리 작전본부로 쓰이는 텐트로 가서

얼굴을 비치는데 맥주를 마시고 있던 후배 선생님들이 술을 안마시겠다는

코맹맹이 소리를 듣고 그 심각성에 모두들 걱정을 한다.

정말 이런 곳에서는 아는 사람을 찾아 술 한 잔씩 나누어야 하는데…


‘스승의 날’이라고 선물 부담을 덜게 아이들과 격리하는 방법을 쓴 것이

휴교를 하고 이웃 교육 동지들과 만나서 몸을 맞대고 우정을 나눈다는 취지다.

아이들이 넷이어서 두 중학교와 두 고등학교가 그들의 모교이기 때문에 나이가 든   

선생님들은 거의 아는 편이어서 인사를 나누고 아이들의 근황을 알렸다.


줄다리기와 장작윷이 그래도 오래까지 남아 응원을 하다 화장실을 다녀오는데

현관 옆 화단 옹색한 구석지에 이 커다란 작약들이 피어 있어 한 번 찍어 보았다.

 

 

♣ 붉은 작약꽃 - 김영태


당신이 오시기까지

열두 겹꽃잎을 고스란히 펼쳐


확확 달아오른 가슴

함박웃음으로 붉게 피어 올려


헐떡이는 뜨거운 볕 발

붉은 바다로 일렁이게 만들어


남아나지 않은 가슴에

금관의 심지를 돋아 올려


불씨 같은 사랑 한줌

성스러운 흔적으로 영혼에 각인시켜


쓰러져 가는 토담아래

혼자 기다리다 지쳐 버려도


축원의 붉은 언덕을 이루어

함박웃음 잃지 않고 춤을 추리다


 

♣ 작약 - 노천명


그 굳은 흙을 떠받으며

뜰 한구석에서

작약이 붉은 순을 뿜는다


늬도 좀 저 모양 늬를 뿜어보렴

그야말로 즐거운 삶이 아니겠느냐


육십을 살아도 헛사는 친구들

세상눈치 안 보며

맘대로 산 날 좀 장기(帳記)에서 뽑아보라


젊은 나이에 치미는 힘들이 없느냐

어찌할 수 없이 터지는 정열이 없느냐

남이 뭐란다는 것은

오로지 못생긴 친구만이 문제삼는 것


남의 자(尺)는 남들 재라 하고

너는 늬 자로 너를 재일 일이다


작약이 제 순을 뿜는다

무서운 힘으로 제 순을 뿜는다


 

♣ 작약 - 홍희표


어금니로 껌을 씹듯

대낮에 시작하여

자정에 끝난

불붙는 당신의 성화

햇빛을 가르는

손거울을 흔드는

당신의 쨍쨍한 음성

녹슨 오장육부 위로

피를 적시고

식은땀을 흘리고

타오르는 등불을 끄고

안방에서 시작한

당신의 딸꾹질 같은 투정은

꽃밭까지 번져 가고

어금니로 껌을 씹듯

그런 모양으로

작약은 피어난다.

 

 

♣ 작약꽃 닮은 어머니 - 구경애


검붉은 다홍치마

헐떡이는 뜨거운 햇살 안고

숨 가쁘게 피는 꽃


유월의 작약

하늘같이 맑은 영혼

그 꽃 이파리

입 맞추시던 어머니


붉은 꽃잎으로 피운

불굴의 사랑

유월의 태양을 딛고

유유히 떠나셨네.


 

♣ 어떤 미소  - 정복여


저 노인, 지금 웅크림은

한 무리의 산양이 풀을 뜯고

햇볕들이 와 와

막사를 짓고 빨래를 하고

온 동네 언덕을 불러

커다란 가마솥을 걸던 들판

그런 연애와 취직과 결혼의 초원

꽃 뿌리도 힘껏 품고 있던 아궁이

그러다 천천히 무너져 내린

이제는 아무도 모르는 동굴

푸르고 단단한 뼈도 묻은

컴컴한 저 조용함이

머뭇 활짝 금이 가는데,


오늘 노인정 작약꽃밭 앞에서

그때 무너지며 함께 묻혔던

햇살 병정들이

저기 저 옛 세월의 손가락들이

천근 침묵의 문을 막

밀치고 나오는 중이다

 

 

♬ Seduces me - Celine Dion

 

출처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글쓴이 : 김창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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