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은 누군가에게 의미 없는 한 해가 될 수도 있고, 그저 그런 한 해가 될 수도 있겠지만 <빨강머리 앤> 혹은 <그린 게이블즈의 앤>의 팬이라면 그 언제보다 의미 있는 한 해가 될 것이다. 올해는 루시 모드 몽고메리가 캐나다의 프린스에드워드 섬에서 보낸 자신의 어린 시절을 바탕으로 1908년에 발표한 소설 <그린 게이블즈의 앤>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비공식적으로 36개국어 이상 번역되어 1억 권 정도로 판매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주근깨 빼빼마른 빨강머리 소녀’의 8권짜리 성장소설은 한 세기에 이르는 시간 동안에도 변하지 않는 보편적인 정서를 가진 작품으로 많은 소녀들(그리고 일부 소년들)의 지지를 얻어왔다.
사실 한국에서 <그린 게이블즈의 앤>은 <빨강머리 앤>으로 더 유명하다. 1952년 일본의 번역가 무라오카 하나코에 의해 작명된 것이 그 유래로 한국에서는 1963년 창조사에서 신지식의 번역으로 소개된 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후 시공주니어와 동서문화사에서 각각 번역되어 출간되다가 2002년 동서문화사에서 최초로 성인용 완역본을 발간하며 캐나다 대사관과 함께 프린스에드워드 섬으로의 여행 이벤트를 주최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한국 팬들은 <빨강머리 앤>을 1986년 KBS에서 방영한 애니메이션과 2002년 EBS에서 방영한 미니시리즈로 추억할 것이다. 사실 <빨강머리 앤>은 1919년과 1934년에 무성영화와 흑백영화로 각각 제작되었고, 1956년부터 2000년 사이에는 여러 버전의 TV무비로도 제작되었지만, 한국에 가장 널리 알려진 애니메이션과 미니시리즈는 그 중에서도 원작을 가장 잘 살린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앤의 목소리, 앤의 분신들
|
특히 1969년부터 1997년까지 닛폰 애니메이션이 제작한 <세계명작극장> 시리즈의 일부로 1979년에 소개된 <빨강머리 앤>은 <미래소년 코난>을 만든 다카하타 이사오와 미야자키 하야오가 각각 감독/각본, 연출을 맡은 작품으로 유명하다. 소설 8부작 중 1부 <그린 게이블즈의 앤>을 50회라는 긴 호흡으로 옮기고, 프린스에드워드 섬 로케이션을 통해 사실적인 배경을 그려냈으며, 원작의 흐름에 맞춰 캐릭터 디자인을 나이별로 3단계로 구성하고 오케스트레이션을 도입한 사운드트랙까지 결합시킨 이 애니메이션은 일본을 비롯해 유럽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고, 한국에서는 1986년에 KBS를 통해 방영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억하는 ‘주근깨 빼빼마른 빨강머리 앤’이라는 가사는 바로 한국어 버전의 가사로 <호호 아줌마>,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마루치 아라치>를 작곡한 정민섭이 만들고 <개구리 왕눈이>, <요술공주 밍키> 등을 부른 그의 딸 정여진이 부른 노래다. 당시 KBS는 <플란다스의 개>나 <엄마 찾아 삼만리>와 같은 <세계명작극장> 시리즈를 수입하면서 일본 정서를 없애기 위해 한국어 주제곡을 별도로 제작하고 성우들도 애니메이션이 아닌 원작 소설에 맞춰 캐스팅했다. 특히 앤의 목소리를 맡은 故 정경애(<베르사이유의 장미>에서 오스칼을 연기했던)는 소녀부터 성인까지 폭넓은 연기가 가능한 베테랑으로 감정표현이 풍부한 연기로 수다스럽고 산만하지만 정이 많은 앤을 더없이 완벽하게 연기해 <빨강머리 앤>과는 분리될 수 없는 존재로 각인되었다. 이 작품은 현재까지도 EBS와 케이블 채널 등을 통해 더빙 버전으로 방영되는 몇 안 되는 작품 중 하나고, 2008년 3월 12일부터 애니맥스 채널을 통해 더빙판이 다시 방영될 예정이다.
이와는 별도로 원작에 가장 가깝게 제작된 미니시리즈로는 1985년, 캐나다의 케빈 설리반 프로덕션에서 제작한 <초록 지붕 집의 앤(Anne of Green Gables)>이 있다. 2002년 EBS에서 방영된 이래 수차례 재방송된 이 작품은 85년 캐나다의 CBC 채널에서 방영 당시 550만이라는 시청자를 확보하며 10여 차례나 제미니 상을 수상하고, 수백여 개의 해외 작품상을 수상했다. 이후 1987년에는 원작 소설의 2부, 3부, 4부를 결합해 <에이번리의 앤(Anne of Avonlea)>이라는 제목의 후속편이 제작되었고, 2000년에는 세 번째 시리즈인 <초록 지붕 집의 앤: 이어지는 이야기(Anne of Green Gables: The Continuing Story)>가 방영되었다. 이 시리즈에 출연한 앤 셜리 역의 메간 팔로우스는 <도망자>와
20세기에도 생명력을 얻는 고전으로서의 <빨강머리 앤>
|
이 두 작품이 한국에서 여러 차례 번역된 소설보다 더 폭발적으로 <빨강머리 앤>을 대중적으로 만든 것은 사실이다. 애니메이션 <빨강머리 앤>의 절대적인 인기가 80년대의 유일하면서도 강력한 매체로서의 공중파 TV를 설명한다면, 2000년대에 방영된 미니시리즈 <빨강머리 앤>의 인기는 한 세대의 공통된 정서적 경험이 대중문화 시장에서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증명한다. 더불어 80년대에 방영된 <빨강머리 앤>을 통해 원작 소설의 방대하고 매혹적인 세계로 인도된 소녀소년들이 성장해 구매력을 갖춘 성인이 된 2000년대에 이르러 <빨강머리 앤> DVD 박스 세트를 비롯해 피규어나 완역본 소설 등이 발매되어 높은 인기를 얻은 것은 그 자체로 시사적이며 버전과는 상관없이 <빨강머리 앤>이라는 작품이 한 세대에게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가늠하게 해준다. 앤 셜리라는 자의식 강하고 엉뚱하며 수다스럽고 상상력이 풍부한 19세기 캐릭터가 시대를 초월해 20세기 소녀들의 감수성과 교감하고, 나아가 21세기를 살아가는 여성들의 롤 모델이 되기도 하는 그 놀라운 과정이야말로 <빨강머리 앤>이 고전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꿈꾸는 소녀가 마침내 건강하고 자의식 넘치는 여성, 근대 시민사회의 일원으로 성장하는 <빨강머리 앤>의 근간에는 19세기적 계몽주의가 흐르고 있지만, 여전히 여성들의 사회적 활동이 논쟁이 되는 한국 사회에서는 이 구시대의 정서야말로 역설적으로 간절한 것인지도 모른다. 긍정적이고 자의식 강한 고아 소녀가 불우한 환경을 이겨내고 교사와 작가, 한 가정의 어머니로 성장하는 <빨강머리 앤>은 그래서 소녀의 성장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19세기라는 사회적인 격변기의 새로운 여성상을 제시한 작품이고, 그것이야말로 시대를 초월해 이 작품이 대중의 절대적인 사랑을 받는 이유다.
'나그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이런 사랑을 하세요 (0) | 2008.03.26 |
---|---|
[스크랩] 책 읽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그림 (0) | 2008.03.19 |
이런사람이 좋다 (0) | 2008.03.18 |
헤르만 헤세의 수채화 그림 (0) | 2008.03.13 |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우의 [하루는 가고] 중에서 (0) | 2008.03.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