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

꽃이 되고, 별이 되고, 달이 되어 --- 원성스님

klgallery 2007. 10. 31. 12:10
 

 

자유인

 

큰 산은 추위와 더위에 의연하며

바다는 더럽고 맑음을 가리지 않는다.

하늘은 크고 작은 것에 마음을 두지 않으며

대지는 사랑을 나눠줌에 아낌이 없다.

태양은 그림자를 드리워 새로운 내일을 기약하며

달빛은 어두운 나락에 희망을 건네준다.

구름은 모였다 흩어짐에 걸림이 없고

수행하는 대자연을 닮아 고요하매

스님들은 대자연을 닮아 얽매이지 않는다.

 

 

낮잠

 

하루에 단 한 시간의 자유시간

정오의 햇살은 최면 광선

달콤한 꿈결 속으로

웃통을 벗어 던지고

"난 침이 너무 많아..."

 

용맹 정진

 

평안에 물든 나 자신과의 전쟁.

혼침과 망상 끌고 당기는 줄다리기

수마와 싸워야 하는 길고 긴 시간.

일주일 간 앉아서 눕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

화두 하나만을 참구해 나가야만 하는 용맹 정진입니다.

 

답장

 

가을이 깊었어요.

마음은 하늘을 쫓아 푸르기만 해요.

내 편지를 받으셨나요.

흰 종이 위에 몽당연필 깎아 써 내려간 고운 사연

산사의 가을이라 담아 보낸 은행잎이랑

내 마음의 손짓이라 두 개 넣은 단풍잎은 어떠셨나요.

 

붉은 우체통 매일같이 들여다보고

두 손 모아 기다렸어요.

오늘 아침 대추나무에서 까칙 울더니만

오늘은 좋은 소식 있을 것 같더니만

내 기다림으로 님을 향한 그리움에 덧씌워지네요.

 

달음질쳐 아무도 몰래 열어보았어요.

이 기쁨을 부처님도 모르실 거예요.

두근거리는 내 가슴에 살포시 품어보면

늦가을 스산함도 정녕 따뜻해요.

 

고마워요.

고마워요.

반 장도 채우지 않은 답장이지만 참 고마워요.

고독이여

 

그대여 오늘 가십니까.

가시되 언제든 언제 가셨냐 싶게 또 돌아오십시오.

잠시 떠나가시긴 하되 제발 아주 떠나가시진 마십시오.

그대 가실 때마다 먼발치의 배웅도 못하고

그대 오실 때에도 마중은 접어두고라도

언제 오실는지 알지도 못하지만

나를 잊지는 말아주소서.

내 마음 안의 글로 파헤쳐도 나올 수 없는

이미 하나 된 내 안의 존재니까요.

그대 영영 나를 떠나시면

내 마음도 함께 내마음을 떠납니다.

그 길은 황량하고 끝이 보이지 않는 나락입니다.

그대를 기다리는 실체 없는 나의 마음만은

그대를 사랑해 온 외로운 나의 마음만은

허공을 맴돌아 그대의 옷자락 끝

안 보이는 공기에라도 맴돌려 합니다.

그대, 안 보이는 곳에서

안 보이는 나의 마음을 모두 가져 가신 이여

같은 하늘 아래만 있어주세요.

떠났다 돌아오시어 제발 같은 하늘 아래만이라도 있어주세요.

상상을 해도 가 닿지 않는 너무 멀리에 계시지는 말고

또다시 돌아와 내 곁에 머물러주세요.

언제나처럼.

늘 그랬던 것처럼.


내 갈 곳은 청산

 

내 갈 곳은 청산

눈앞에 펼쳐진 오솔길 따라

깨달음을 향한 수행길

 

바람처럼, 구름처럼, 물처럼

모였다 사라지고

사라졌다 다시 모여

맑은 향기로움만

깊게 배어 있는 그곳

붓다의 호흡이 살아 숨쉬는 나의 고향

 

내 갈 곳은 청산

귓속을 맑게 하는 청명한 목탁 소리

깨달음을 향한 기원의 나라

 

솔바람, 푸른 대숲, 맑은 물 계곡

휘영청 달 밝은 밤이면

풍경소리 곱디고와라.

맑은 소리로만

내게 건네주는 그곳

붓다의 마음이 전해지는 나의 고향

 

외로울 때 함께 울어주던 나의 도반은

아직도 그곳에 살고 있단다.

 

나는 웃어야만 한다

 

나를 보고 기뻐하고

나를 느끼고 맑아지려 하고

나를 안고 위안을 삼고

나를 그리며 희망을 가지고

나를 품어 꿈꾸어 살고

나를 알고 열심히 정진하고

나를 생각하며 행복해지고

나를 간직하고 착한 일 하려는 사람을 위하여

나는 웃어야 한다.

 

병이 들어 아파도

며칠 밤을 새워 힘들고 피곤해도

슬퍼도, 외로워도, 괴로워도

참아야 한다. 버려야 한다.

 

나를 모르고

나를 잊은 이들을 위해서라도

나는 웃어야 한다.

 

 

스스로 내게 던지는 제안

 

글을 쓰고, 화초를 가꾸고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부르고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고

책을 읽고, 운동을 하고

 

잠시의 위안과 휴식

즐거움 그리고 대리만족

얻어지는 작은 보람

새로운 욕망을 싹트게 한다.

 

하지만 나는 안다,

이 모든 것이 취미라는 이름의 도피처임을.

식을 줄 모르는 자기 위안임을.

 

나를 잊으려고 도피처로 삼아

흠뻑 빠져 취미라는 구실 삼아

하나밖에 모르는 무식함에 허전함으로

내 안에 욕구를 밖으로 표출하면서

식을 줄 모른다.

하루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던 자기 보기

고요히 앉아 때로는

밖을 바라보는 시선을

안으로 거두어 보자.

이러고 싶을 때

 

목놓아 울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사무쳐 밀려오는 설움도 있습니다.

복받쳐 끓어오르는 분노도 있습니다.

삭혀도

삭혀도

터지는 슬픔이 있습니다.

고통과 외로움, 슬픔이 있을 때

이러고 싶습니다.

 

 

- 원성스님의 글과 그림 -


레이정(Ray Jung)의 '영혼의 땅(Spirit 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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