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io Lanza (31 January 1921 – 7 October 1959) was an American tenor and Hollywood movie star who enjoyed success in the late 1940s and 1950s. His voice was considered by many to rival that of Enrico Caruso, whom Lanza portrayed in the 1951 film The Great Caruso. Lanza was able to sing all types of music. While his highly emotional style was not universally praised by critics, he was immensely popular and his many recordings are still prized today.
20세기가 낳은 미성 마리오 란자
Mario Lanza (31 January 1921 – 7 October 1959)
마리오 란자는 1921년 이태리계 부모의 외동 아들로 South Philadelphia에서 출생했다. 어린 시절부터 란자는 카루소를 우상으로 삼았고 훗일 카루소 같은 훌륭한 성악가가 되기를 바라면서 열심히 공부했다. 마리오 란자는 오페라 무대가 아닌 다른 경로를 통해 유명해졌다. 트럭 운전사로 일하면서 성악 교사의 지도를 받고 지내던 마리오 란자는 20세가 되던 어느날 커티스 음악원 강당에 피아노를 배달하러 가서 평소처럼 오페라 아리아를 흥얼거리며 일을 하고 있었다. 때마침 당시 보스톤 심포니의 지휘자 쿠세비츠키(Sergey Koussevitzky 1874~1951)가 이를 지켜보고는 그의 재능에 놀라면서 버크셔(Berkshire) 음악센터에 그를 소개, 잠재된 능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게 되었다.
2차 대전이 발발하자 마리오 란자는 군에 입대했고, 제대 후인 1945년에는 드디어 당시 미주 대륙 최대의 레코드사였던 RCA사와 전속 레코딩 계약을 체결하였으며 1947년에는 헐리우드에서 영화까지 진출하게 된다. 1949년 ''That Midnight Kiss''를 시작으로 마리오 란자는 영화계에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고 당시의 인기 발라드 뿐만 아니라 베르디 오페라의 유명한 아리아도 불렀다.
그의 두 번째 영화 ''The Toast of New Orleans''도 흥행에 성공했고 유명한 그의 노래 ''Be My Love''로 세계 음악 차트의 10위권 안에 들었다. 그의 세 번째 영화가 바로 유명한 ''The Great Caruso- 위대한 카루소''인데, 카루소를 추모하기 위해 만든 이 영화에서 주인공 카루소 역을 맡아 명성을 떨치며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오페라 가수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하지만 그는 실제 오페라 무대에는 자주 서지 못했다고 하는데 1948년에 푸치니의 <나비부인>의 핀커톤 역으로 단지 두 번만 섰을 뿐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지금도 음악계에서는 그를 정통 오페라 가수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영화를 찍던 중 감독과의 논쟁을 벌인 이후로 헐리우드 영화계를 떠난 마리오 란자는 1957년에 로마로 이사를 간다. 거기에서 그는 영화 두 편을 찍고 유럽 콘서트 여행을 가졌다. 그러나 오페라 무대 복귀를 준비하던 그는 1959년 8월 7일 로마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에 갑자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카루소의 계승자로 불리던 마리오 란자는 38세의 나이로 아깝게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영화와 RCA에 10여 년간 남긴 400회의 레코딩으로 그를 만날 수 있다.
그의 멋진 전설은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특히 그가 불러 히트를 쳤던 곡 ''Be My Love'', ''The Lovelist Night of the Year'', ''Because You''re Mine'' 등은 지금도 세계 유명 성악가들에게 널리 애창되고 있다고 한다.
글 출처 : 도시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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