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뉴스

[스크랩] [정호승]윤동주 무덤 앞에서

klgallery 2006. 6. 26. 18:27




윤동주 무덤 앞에서
정 호 승
이제는 조국이 울어야 할 때다 
어제는 조국을 위하여 
한 시인이 눈물을 흘렸으므로 
이제는 한 시인을 위하여 
조국의 마른 잎새들이 울어야 할 때다 
이제는 조국이 목숨을 버려야 할 때다 
어제는 조국을 위하여 
한 시인이 목숨을 버렸으므로 
이제는 한 젊은 시인을 위하여 
조국의 하늘과 바람과 별들이 
목숨을 버려야 할 때다 
죽어서 사는 길을 홀로 걸어간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웠던 사나이 
무덤조차 한 점 부끄럼 없는 
죽어가는 모든 것을 사랑했던 사나이 
오늘도 북간도 찬 바람곁에 서걱이다가 
잠시 마른 풀잎으로 누웠다 일어나느니 
저 푸른 겨울하늘 아래 
한 송이 무덤으로 피어난 아름다움을 위하여 
한 줄기 해란강은 말없이 흐른다
윤동주 무덤 앞에서  
여울
이제는 조국이 울어야 할 때다
어제는 조국을 위하여
한 시인이 눈물을 흘렸으므로
이제는 한 시인을 위하여
조국의 마른 잎새들이 울어야 할 때다
이제는 조국이 목숨을 버려야 할 때다
어제는 조국을 위하여
한 시인이 목숨을 버렸으므로
이제는 한 젊은 시인을 위하여
조국의 하늘과 바람과 별들이
목숨을 버려야 할 때다
죽어서 사는 길을 홀로 걸어간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웠던 사나이
무덤조차 한 점 부끄럼 없는
죽어가는 모든 것을 사랑했던 사나이
오늘은 북간도 찬바람결에 서걱이다가
잠시 마른 풀잎으로 누웠다 일어나느니
저 푸른 겨울하늘 아래
한 송이 무덤으로 피어난 아름다움을 위하여
한 줄기 해란강은 말없이 흐른다 




대시인의 묘비로는 너무 초라하다.
그러나 사연을 알고 보면 탓할 수도 없는 일.
이 묘비는 윤동주의 무덤을 처음으로 쓰던 당시의 것이다.




중국 길림성 용정시 윤동주 생가에 전시된 윤동주 님의 친필 '서시'


윤동주의 장례식 사진


윤동주의 장례식 사진

 

윤동주의 장례식 사진


윤동주 생가


윤동주 서시


교토의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에 있는 윤동주 시비


용정제1중학교에 있는 윤동주 시비


연세대학교 교정의 윤동주 시비 - 서시

하늘과바람과별과시...

윤동주 시인의 유해는 일본에 없습니다. 1945년 2월 16일 규슈(九州)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옥사하셨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악랄한 생체실험의 희생양, 즉 마루타가 되어 돌아가셨다는 설도 있습니다.

거의 기정사실화되고 있죠.

윤동주 시인의 무덤은 북간도의 용정 동산에 있습니다. 일제의 악랄한 행위로 인해 샛별같던 한 시인의 죽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제, 동주는 세상을 떠나고 없다. 그러나 오늘날 이 땅의 많은 젊은이들이 즐겨 외는, 그의 대표작 ‘별 헤는 밤’의 끝 넉 줄은, 단순히 시구(詩句)로만 끝난 것이 아니라 현실(現實)이 되었다.

그의 고향인 북간도(北間道) 용정(龍井)에 있는 동산 마루턱에 묻힌 그의 무덤 위에는 이 봄에도 파란 잔디가 자랑처럼 돋아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동주는 멀리 북간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시 속에 배어 있는 겨레 사랑의 정신은 그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의 가슴 속에 영원(永遠)히 살아 남아 있을 것이다.

용정 윤동주 시인의 묘를 찾아

이화수(아주대 교수)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살기란 기실 얼마나 어려운가. 아니 얼마나 불가능한가. 민족혼의 서정시인 윤동주는 이 부끄러움을 너무나 절실히 끌어안고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마침내 '부끄럼'과 '괴로움'을 극복하고, 그 가혹한 일제시대에도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며 올곧게 자신을 가다듬어 세웠으며, 마침내 민족시인으로 길이 우리의 가슴속에 살아 있게 된 것이다.

구비구비 흐르는 해란강은 용정을 휘돌아 흐르고 있었다. 우리 일행이 탄 마이크로버스는 해란강에 걸려 있는 용문교를 건너갔다. 다리는 보수공사중이어서 반쪽만 쓰고 있었다.

두렁길을 따라 언덕 위에 오르니, 조선족이 용정에 정착할 당시에 쓰던 집과 갖가지 가정 용품, 의류, 장식품 등은 전시하고 있는 조선민족박물관이 있었다.

버스를 돌려 언덕의 능선을 따라 1km 가량 올라갔다. 능선 왼쪽에는 강냉이밭과 콩밭이 널려 있었고, 오른쪽에는 무성한 잡초만 자라고 있었다. 야산에 널려 있는 무덤들 가운데 윤동주 시인의 무덤이 있었다. 무덤 앞에 모여 선 우리는 엄숙하게 기도한 뒤, <선구자>를 합창했다.

그는 1917년에 태어나 용정의 은진중학교를 다니다가 광명중학교로 전학했고, 1938년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했다. 도오시샤(동지사)대학에 다니던 1943년, 여름방학을 맞아 귀향하다가 일경에 의해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2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해방을 6개월 앞둔 1945년 2월 28세의 젊은 나이로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윤동주 시인의 무덤은 오랫동안 고향의 이 버려진 언덕에 잊혀진 채 있었다. 3년 전 연변대학에 교환교수로 와 있던 일본인 오무라 교수에 의해 그의 무덤이 확인되었고, 미국의 교포와 용정의 뜻있는 분들이 모임을 만들어 무덤을 단장하고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용정시 너머 일송정이 있었다는 언덕이 바라보였다.

박물관에서부터 우리를 안내한 아가씨는 닷새 전에 오무라 교수가 다녀갔다고 했다. 비석 앞에는 조화가 한 다발 놓여 있었다. 우리는 코스모스 화환을 바쳤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 합니다."

나는 마음속으로 <별 헤는 밤>을 외며 조용히 언덕을 내려왔다.

(1988년 9월 22일 목요일 한겨레 신문)

동주의 가을, 동주의 슬픔

문익환

1980년 가을 육군교도소에 있을 때였군요. 하느님마저 슬픔으로 보이기 시작한 것이, 동주의 시세계에서 넘쳐나는 것이 슬픔이라는 걸 깨닫게 된 것도.

내 마음이 슬픔으로 차 있었기 때문에 동주의 시세계도 그렇게 보인 것일까요? 아닙니다. 결코 그런게 아닙니다. 그의 시집 두어 장을 넘겼더니 이런 구절이 나의 가슴을 때리는군요.

여기저기서 단풍잎 같은 슬픈
가을이 뚝뚝 떨어진다.

동주의 슬픔은 개인의 슬픔이 아니라 겨레의 슬품이었군요. 흰수건이 검은 머리를 두르고 흰 고무신이 거친 발에 걸린 족속, 흰 저고리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고 흰 띠로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인 슬픈 족속의 하나로 태어나 그 슬픈 운명을 짊어지고 살아가야 하는 마음이 슬픔이 아니라면야 하는 마음이 아니었지요, 그에게 있어선 시인이란 '슬픈 천명(天命)'이었으니까요.

그의 나이 스물둘 아니면 셋이었을 때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 '팔복'은 온통 슬픔이군요. 마음이 가난한 사람도 온유한 사람도 타는 목마름으로 정의를 갈구하다 박해를 받는 사람도 자비를 베푸는 사람도 마음이 밝은 사람도 다 슬프기 때문에 행복하다는군요. 그리고 그 행복이 잠깐이 아니고 영원한 거리려면 슬픔도 영원할밖에 없다는군요.

영원한 슬픔, 그건 하느님일 수밖에 없는 거죠. 하느님이 영원한 슬픔으로 경험되면, 사람의 마음도 영원히 슬플 수밖에 없는 하느님의 마음이 된다는 거군요. 20대 초반에 이내 그의 마음에 짙게 배어들었던 슬픔이 40년이 지난 후에 겨우 나의 가슴에서도 번져나왔군요. 동주가 망국의 슬픔에서 느꼈던 걸 나는 조국 본연의 슬픔에서 느꼈다는 데 차이가 있다면 있는 거구요.

.........

동주와 내가 같이 살던 북간도의 가을은 퍽 짧은 것이었습니다. 짧기로 말하면 봄도 매 한가지였지요. 길고 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다 싶으면 어느새 여름인 겁니다. 여름은 겨울 같이 긴 건 아니지요. 여기서처럼 느긋이 뜸을 들여가며 만물이 자라고 익을 겨를이 없습니다. 숨 돌릴 겨를도 없이 밤낮 정신없이 자라고 익어야 하니까요, 바쁜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왔다 하면 어느새 겨울이 들이닥치거든요. 그래서 가을은 여름보다도 더 바쁘지요. 곡식이나 남새에 가을걷이하는 손길이 닿기도 전에 언제 서리가 내리고 눈이 쏟아질지 모르거든요. 그래서 가을은 짧기만 한 게 아니라 정신없이 바쁜 계절이지요.

동주나 내가 소학교 다닐 시절이었습니다. 추석인데 눈이 쏟아져서 축구대회가 중단된 일이 있었던 것이, 이만하면 가을이 얼마나 정신없이 바쁜 계절이었느냐는 걸 알 수 있지요?

이렇듯 바쁜 계절이 동주에게는 슬픔이었군요. 시대를 슬퍼한 일이 없다면서도 그의 마음은 동생의 얼굴에서도 슬픔을 읽고 있었군요. 맑은 강물이 사랑처럼 흐르는데 거기 어린 순이의 얼굴도 슬픈 얼굴이었군요.

동생의 얼굴에서 번져나오는 슬픔도 순이의 얼굴을 적시는 슬픔도 동주의 슬픔이었지요. 나라잃은 망국민의 슬픔이었지요.

그러나 그 슬픔은 긴 겨울이 지나고 찾아올 희망으로 얼룩진 눈물겨운 슬픔이었군요.

봄이 혈관속에 시내처럼 흘러
돌, 돌, 시내 가차운 언덕에
개나리, 진달래 노오란 배추꽃

삼동을 참아온 나는
풀포기처럼 피어난다

겨울이 지나고 그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아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그의 이름자 묻힌 용정 동산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걸 마음은 나만의 것은 아닐테지.

동주와 같이 거닐던 동산 언덕 위를 찾아 그의 무덤 앞에 서는 날, 그의 무덤에 흙을 얹어 주고 잔디를 입혀 주면서 나는 울 것인가? 그의 비석을 쓸어안고 나는 흐른는 눈물을 닦아야 할 것만 같군요.

출처 : 살맛 나는 세상이야기들...
글쓴이 : 크레믈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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