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뉴스

류시화 Shiva Ryu 님의 페이스북에서 펌

klgallery 2017. 6. 19. 11:19




소아마비에 걸린 소녀가 있었다. 오른쪽 다리가 짧고 가늘어서 학교에선 절름발이라고 따돌림당했으며, 절뚝거릴수록 척추와 골반이 틀어졌다. 사진작가이며 간질 환자인 아버지는 장애 가진 딸을 이해하고 문학과 철학을 가르쳤다. 체력을 키울 수 있게 자전거, 롤러스케이트, 수영, 권투, 레슬링도 시켰다. 또 인화와 보정 등 사진술을 가르쳤다.

소녀는 공부를 잘해 엘리트 코스인 명문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의대 진학을 준비하던 졸업반 때, 타고 가던 목제 버스가 전차와 충돌했다. 철제 봉이 그녀의 골반을 관통했으며, 갈비뼈와 빗장뼈도 부러지고, 이미 약해져 있던 오른쪽 다리뼈는 열 조각으로 부서졌다. 퇴원 후 치료비를 벌기 위해 일을 했지만 척추뼈 3개가 어긋난 것이 뒤늦게 밝혀져 허리 깁스를 하고 몇 달 동안 침대에 갇혀 지냈다.

고통과 후유증이 이어져 친구들은 그녀를 '산 송장'이라 불렀다. 의사가 못 되는 대신 의료용 삽화가라도 되기 위해 침대에 이젤을 ...설치했다. 그리고 이젤 위에 거울을 붙여 놓고 시험 삼아 자화상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은 통증을 잊는 좋은 방법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정체성과 존재를 탐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자화상 연작은 생을 마칠 때까지 계속되었다.

퇴원 후 의대 진학을 포기하고 진지하게 그림 작업을 해나갔다. 비극적인 사고가 그녀의 소명을 일깨운 것이다. 스물두 살에 그녀는 스무 살 연상의 유명한 화가와 결혼했다. 나이뿐 아니라 몸무게도 100킬로그램 가까이 차이가 나서 어머니는 코끼리와 비둘기의 결혼이라며 반대했다. 결혼하고 보니 남자에게는 이미 두 명의 아내가 있었다. 버스 사고 이후 또 다른 비극적 충돌이었다.

결혼 후 그녀는 유명한 화가 남편의 아내로만 세상에 알려졌으나 세 번의 유산, 괴사된 발가락 절단, 자유분방한 남편과 여동생의 불륜, 이혼 후 재결합 등 모든 고통과 삶의 의지를 화폭에 담으며 끝내 붓을 놓지 않았다. 화단에서는 그녀의 그림을 초현실주의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 모든 일이 나에게는 초현실이 아니라 현실'이라고 말했다. 악화된 척추를 지탱하기 위해 쇠와 가죽으로 된 28개의 지지대를 몸에 묶고 그림을 그려야 했기 때문이다. 손의 감염, 다리 괴사, 매독이 겹쳤다. 30대 후반에는 계속 서 있거나 앉아 있는 것이 불가능했다. 골수 이식 수술은 세균 감염이라는 부작용을 낳았고 수술이 반복되었다.

그녀의 임박한 죽음을 알아차린 한 사진작가가 그녀를 위해 조국 멕시코에서 최초의 개인전을 마련했다. 전시회 오프닝 날, 의사는 반대했지만 그녀는 구급차를 타고 도착해 전시회장에 미리 설치된 침대로 옮겨졌다. 작품들은 멕시코뿐 아니라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해에 괴저로 인해 오른쪽 다리를 무릎 아래서 잘라야 했다. 그리고 이듬해에 '나는 기쁘게 외출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라는 문장을 적고 세상을 떠났다. 그녀 사후에 멕시코 정부는 그녀의 작품을 국보로 분류했다.

'고통의 영웅(La heroina del dolor)'으로 불린 프리다 칼로. 그러나 웃음과 유머와 열정을 잃지 않았던 그녀는 파블로 피카소, 꽃과 사막의 화가 조지아 오키프, 초현실주의 시인 앙드레 브루통과 현대 미술의 혁명가 마르셀 뒤샹, 러시아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 야수파 화가 후안 미로 등 많은 위대한 인물들과 진심 어린 우정을 나눴다.

살아 있는 것은 아프다. 그러나 신은 모두를 위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 40년 넘게 수백 명의 인생을 추적 조사한 하버드대학의 심리학자 조지 베일런트는 인간 삶의 모습을 이렇게 요약했다.
"과학의 대상으로 삼기에는 너무도 인간적인, 숫자로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아름다운, 진단을 내리기에는 너무도 가슴 저리는, 책으로 묶기에는 그 자체로 영원불멸한……."

photograph_<Frida Kahlo> by Nickolas Mur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