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뉴스

성모 발현

klgallery 2013. 7. 27. 15:03


구노의 아베마리아 / 프래시드 도밍고
 
 
 
성모 발현과 그 메시지들

“하느님 뜻 전하는 어머니따라 끊임없이 기도하고 회개해야”

 

교회 역사 안에서 성모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모친이요, 교회의 어머니로서 당신 아들의 이름으로 하느님 뜻을 알리는 초자연적인 현현(顯現) 현상을 여러 차례 보여왔다.

성모 마리아와 관련된 축일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축일로 꼽히는 성모 승천 대축일을 맞아 교회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성모 발현과 그 메시지들을 소개한다.

그간 교회의 정식 인가를 받은 성모 발현은 1858년 2월 11일~ 7월 16일 프랑스 루르드에서 보인 18차례의 발현을 비롯 멕시코 과달루페, 프랑스 라 살레트, 아일랜드 노크, 포르투갈 파티마, 벨기에 보랭과 바뇌 등 총 일곱 차례로 꼽힌다.

이 같은 발현을 통해 드러난 성모 마리아의 주된 메시지는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 그리고 어려울 때 자신을 찾아 의탁할 것을 간청하는 모습이었다.

■ 과달루페(Guadalupe)

과달루페의 성모
 


“나는 평생 동정이며, 하느님의 어머니임이 알려지기를 원하고 어려울 때에 정성을 다해 나를 찾는 이들에게 나의 자비를 드러내도록 이 자리에 성당을 짓기를 바란다.”

1531년 12월 9일 멕시코 원주민 후안 디에고(Juan Diego)에게 성모 마리아는 4차례에 걸쳐 나타나 이 같은 메시지를 남겼다. 원주민들이 신전을 세웠던 테페약언덕에서 성모 마리아는 인디언 피부의 용모를 보였다.

당시 멕시코는 스페인에 의해 정복된 지 10년 되는 해를 맞고 있었고 원주민들이 폭압과 폭정에 시달리고 있던 상황. 이 성모 발현은 이후 8년 만에 당시 800만 인구 중 700만 명이 영세, 입교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 파리(Paris)

뤼뒤박의 성모
 
 

성모는 1830년 11월 27일 파리의 뤼 뒤 박 소재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 지원자였던 카타리나에게 나타나 지구 위에 서서 두 팔을 지구 위로 활짝 펼친 형상을 드러냈다. 그 주변에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여, 당신께 의탁하는 우리를 위하여 빌으소서’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때 자신이 나타난 모습대로 메달을 만들어 지니는 사람은 큰 은총을 받을 것이라 했는데, 그 후 메달 착용이 늘어나면서 수많은 기적이 일어나 ‘기적의 메달’이라고 불리게 됐다.

이 발현은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에 대한 신심을 고조시켰고 교황 비오 9세는 1854년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없으신 잉태’를 믿을 교리로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 프랑스 파리의 기적의 메달성당. 지구 위에 서 있었던 발현 당시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재현했다.

■ 라 살레트(La Salette)

라살레뜨의 성모
 
 


성모 마리아가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죄인들의 화해자’라고 밝힌 발현이다. 과학만능주의, 자유주의, 무신론의 풍조 속에 전통적 신앙과 성서 가르침이 위기를 맞던 19세기 후반, 1846년 9월 19일 프랑스 가르가스산 기슭의 라 살레트에서 11세의 막시망 지로와 15세의 멜라니 마티유 칼바에게 나타난 성모는 인류가 회개하여 하느님과 화해하면 축복을 받지만 그렇지 않으면 큰 벌을 받으리라고 경고했다.

발현 당시 사람들은 이 메시지를 무시했으나 보불 전쟁과 대흉년으로 100만 명 이상이 굶어죽는 재앙이 닥쳐오자 회개하는 순례객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 루르드(Lourdes)

루르드의 성모
 
 


성모는 1858년 2월11일부터 7월 16일까지 18회에 걸쳐 루르드 동굴에서 14세 소녀 베르나 데트에게 발현했다.

이때는 교황 비오 9세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없으신 잉태’ 교리를 반포한 지 4년째 되는 해였고 자유주의 사상의 팽배로 지식층들이 교회 가르침을 의심하고 교회를 떠나는 경향이 늘어나던 시기였다.

‘원죄없는 잉태된 자’로 본인을 소개했던 성모는 기도와 보속 행위, 회개를 촉구했으며 많은 묵주기도를 권했다. 이후 루르드에는 매년 수백만 명의 순례자가 방문하고 있으며 수많은 기적이 보고되었다.

■ 퐁멩(Pontmain)

퐁멩의 성모
 


1871년 1월 17일 프랑스 부르타뉴와 노르망디 접경 지역 라발 교구 작은 마을 퐁멩에 12세 외젠느와 11세 요셉 바르베데트에게 성모가 자신을 드러냈다. 그리스도가 못 박힌 붉은 십자가를 양손에 잡은 모습이었고 검은 면사포에 허리띠 없는 짙은 하늘색 바탕에 별들이 그려진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이때 성모 마리아는 ‘얘들아 언제나 기도하여라. 내 아들은 너희의 기도를 들어 허락하신다’는 글씨를 아이들에게 보여주었다.

러시아 군대가 프랑스 전역을 침략, 위태로운 상황을 맞던 처지에서 발현 후 10여일 만인 1월 28일 휴전 협정이 조인되자 많은 이들이 발현한 성모를 ‘희망의 여인’으로 부르며 순례를 했다고 한다.

▲ 프랑스 퐁멩. 1871년에 발현한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되살렸다.

■ 노크(Knock)

노크의 성모
 


19세기 후반 아일랜드는 영국의 억압과 대기근으로 큰 고통을 겪고 있었다.

1879년 8월 21일 아일랜드 노크에서 마을 주민 15명에게 나타난 성모는 흰옷을 입고 기도하는 모습으로 성 요셉과 사도 요한과 함께였다.

제대와 어린양 주위로 천사들이 돌고 있는 모양의 발현이었다. 특별하게 말씀으로 전한 메시지는 없었으나 미사의 중요성을 특히 강조한 것으로 알려진다.

■ 파티마(Fatima)

파티마의 성모

 
 


1917년 5월 13일부터 10월 13일까지 6차례에 걸쳐 포르투갈 레이리아 교구 작은 마을 파티마에서 10세의 루치아, 7세의 히야친타, 9세의 프란치스코에게 발현했다.

‘로사리오의 여왕’이라고 자신을 밝힌 성모는 세계 평화를 위해 매일 묵주 기도를 바칠 것과 죄인을 위해 희생할 것, 그리고 성모성심을 공경할 것을 요청하였고 특히 러시아를 당신 성심에게 봉헌하고 매월 첫 토요일 영성체 할 것을 당부했다. 또 끊임없는 기도와 희생 보속을 통해서만 세계 평화와 러시아의 회개 및 교회의 안정 평온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예언했다.

▲ 성모 마리아의 발현을 기려 포르투갈 파티마에 세워진 파티마성당.

■ 보랭(Beauraing)

보랭의 성모
 


1932년 11월 29일부터 1933년 1월 3일 사이, 벨기에 남부 지역 보랭에서 9~15세 다섯 아이들에게 33회에 걸쳐 나타났다. 흰옷에 황금관을 쓰고 양손을 들어 티없는 황금빛 성심을 드러내 보인 성모는 자신을 ‘원죄없이 잉태된 티없는 동정녀, 하느님의 어머니요 천상 여왕’ 으로 전하고 끊임없는 희생과 기도 및 죄인들의 회개를 청했다. 이후, 공산주의 영향으로 교회를 떠났던 많은 신자들이 회개하고 돌아왔다. 발현 첫해의 순례자가 200만 명이 넘을 정도였다. 병의 치유와 영적 치유(회개)도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 바뇌(Banneux)

바뇌의 성모
 



1933년 벨기에 바뇌에서 비신자였던 12세 소녀 마리에트에게 발현, ‘가난한 자의 동정녀’라고 자신을 칭했다. 루르드 발현 때처럼 흰 옷에 푸른 허리 띠를 두르고 고개를 약간 왼쪽으로 숙인채 합장하고 오른팔에 묵주를 늘어뜨린 모습이었다. 이때 성모는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위로하러 왔다고 밝히고 기도를 많이 바칠 것을 요청했다. 그후 수많은 성당이 바뇌의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됐다.

성모님의 발현

1846년 9월 19일, 성모칠고 축일전날, 11세의 소년 막시민 지로드와 15세의 소녀 메라니 마튜는 프랑스 남부 라 살레뜨라는 마을 앞에 있는 산 기슭에서 소를 치고 있었다. 막시민가 메라니가 맨 처음 본 것은 눈이 부시게 광채가 나는 공 모양의 물체였다. 놀라서 쳐다보고 있으려니까 그 공 모양의 물체가 열리면서 한 여인이 울고 있었다. 두 어린이는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메라니는 막대기를 들고 있다가 얼떨결에 땅에 떨어뜨렸다. 그랬더니 막시민은 "그걸 짚고 있어, 여차하면 후려치게"라고 말했다.

이 때 여인은 몸을 일으켜 서서 팔짱을 끼고 아주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애들아 조금도 두려워 말고 가까이 오너라. 나는 너희들에게 중요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여기에 왔다." 어린이들은 작은 시내를 건너 여인의 앞으로 갔다. 여인은 두 어린이의 사이에 섰다. 비록 눈에 눈물이 가득했지만 여인의 얼굴은 아름다웠다. 여인은 장미술이 달린 망토를 입고 있었다. 가느다란 목걸이에 십자가가 달려 있었고 흰 면사포를 쓴 머리 위에는 가지각색의 장미로 꾸며진 면류관을 쓰고 있었다. 여인은 어찌나 아름답고 빛이 찬란한지, 어린이들은 겨우 쳐다보았다. 그들은 후에 그 여인의 아름다움에 비길만한 것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여인은 이 세상의 어떤 음악보다도 훨씬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말하는 동안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만일 나의 백성이 순명하지 않는다면 나는 내 아들의 손을 더 이상 잡고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손은 너무나 강하고 너무나 무겁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할 것이다. 나는 얼마나 오랫 동안이나 너희들을 위해 고통을 받아야 한단 말이냐? 나의 아들이 너희들은 버리지 않게 위해서 나는 끊임없이 기도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너희들은 그 점에 대해 조금도 마음을 쓰지 않는구나. 너희들이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한다 할지라도 내가 너희들을 위해 당하는 괴로움의100분의 1도 기워갚지는 못할 것이다. 성모님께서 계속 말씀하시길 사람들이 주일을 거룩히 지내지 않음과 당시 아들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는 것이 당신 아들의 팔을 그토록 무겁게 하는 여러 가지 죄중에 일부임을 특히 지적 하셨으며, 재앙이 세상에 찾아오는 것은 인류가 저지른 죄의 결과라는 사실도 분명히 하셨다.

 

발현 개요

성모님이 루르드를 택하신 것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었다.
   성모님이 발현하셨다는 뉴스가 전파되자 많은 사람들이 루르드의 동굴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성모님을 보는 것은 베르나데트 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컴컴한 동굴밖에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베르나데트의 모습을 봄으로써 성모님의 발현을 알았다. 그녀는 성모님이 발현하면 곧 탈혼 상태에 들어갔다. 거의 모든 사람들은 베르나데트의 이야기를 믿었다. 그러나 관리들과 지성인이라 자처하는 소수의 사람들은 이를 비웃었다. 그리고 그 소수의 사람들은 소란을 피웠다.
   2월 18일 목요일은 성모님이 세 번째 발현하신 날이었다. 성모님은 그 날 베르나데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앞으로 2주 동안 매일 이곳에 오너라. 나는 너에게 이 세상의 행복은 약속하지 못하지만 다음 세상의 행복은 약속하마." 베르나데트는 죽을 때까지 성모님의 이 말씀을 가슴속에 간직했다.
   여섯 번째 발현 때 성모님은 슬픈 표정을 하시면서
   "죄인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성모님은 곧 표정을 고쳐 미소 지으셨다.
   라살레트에서 성모님은 내내 통곡하셨다. 그러나 루르드에서는 간혹 슬픈 표정을 하시기도 했지만 자주자주 미소를 지으셨다. 그 차이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아마도 성모께 대한 신심의 증가와 무염 시태 교리의 선포가 주요 원인이었을지도 모른다.
   여덟 번째 발현 때 베르나데트는 두 무릎으로 성모님이 서 계신 동굴 앞 장미나무 있는 곳까지 기어 갔다. 그녀는 무릎 걸음을 옮길 때마다 허리를 굽혀 절을 한 후 몸을 돌려 사람들을 향하여 "통회하라! 통회하라!"하고 외쳤다.
   아홉 번째 발현 때 성모님은 베르나데트에게 우물 자리를 잡아 주셨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까지 백여 년을 두고 많은 병자를 낫게 한 저 유명한 루르드의 우물이다.
   2월 26일 금요일, 성모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죄인들을 위하여 머리를 숙여 땅에 입맞추어라." 베르나데트는 얼른 그렇게 했다. 그것을 본 대부분의 사람들도 똑같이 그렇게 했다.
   3월 2일 성모님은 당신이 발현하신 곳에 성당을 지으라고 말씀하셨다. 성모님은 또한 그곳에 많은 사람들이 참배하기를 바란다고 말씀하셨다.
   3월 25일은 성모 영보 축일이었다. 그 날 따라 베르나데트는 자기 앞에 서 있는 부인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그 부인이 바로 성모님이라고들 말했다. 그러나 베르나데트에게는 그저 '부인'일 뿐이었다.
   그리하여 소녀는 부인에게 이름을 물었다. 부인은 미소를 지을 뿐 대답이 없었다. 소녀가 세 번째 물었다. 그 때의 일을 베르나데트는 이렇게 말한다.
   "부인은 장미나무 위에 서 계셨다. 그 모습은 '기적의 메달'에 그려진 성모님과 비슷했다. 내가 세 번째 물었을 때 부인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부인은 겸손한 자세로 고개를 약간 숙이는 듯했다. 부인은 두 손을 합장하여 가슴 위로 올리더니 하늘을 향해 눈을 올렸다. 부인은 서서히 손을 편 후 나를 향하더니 감격에 떨리는 음성으로
    '나는 하자 없는 잉태로다'라고 말했다."
    순박한 농부의 딸 베르나데트는 그 중대한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녀는 페라말 본당 신부에게 그 말을 전했다. 본당 신부도 그 때가지 성모님의 발현을 의심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이제 그의 의심이 걷히기 시작했다. 그 순박한 소녀가 그렇게 어려운 말을 지어 낼 수는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성모님은 불과 3년 남짓 전에 교황 비오 9세가 선언한 무염 시태 교리를 그런 방법으로 추인하셨다. "나는 하자 없는 잉태로다." 이 얼마나 묵시적인 말이냐? 그 한마디 속에는 원조의 범명과 강생 구속 교리도 포함되어 있지 않은가? 그것은 우리를 각성시키기 위한 그리스도의 계시에 대한 새로운 요약이다. 시기적으로는 세상 사람들이 원천적인 계시를 까맣게 잊어 가고 있을 때었다.

프랑스 정치인들은 루르드의 일을 불안한 눈초리로 지켜 보고 있었다. 점점 많아지는 군중들의 수는 그들의 신경을 예민하게 만들었다. 1789년, 1830년, 그리고 1848년 3차에 걸쳐서 프랑스 정부를 뒤엎은 것은 바로 파리의 군중이었다. 1858년 루르드에 모인 군중은 어떤 짓을 저지를지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당시 프랑스를 통치하던 제3 제국의 정정(政情)은 그리 안정되어 있지를 못했다.
    당시 프랑스 정치인들은 거의 모두가 가톨릭 신자임을 자처하였다. 사실 그들은 보통 교우들과 똑같이 주일마다 미사에 참례하고 판공 성사를 보고 교무금을 내고 영성체를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성모님의 발현 같은 것은 아예 믿으려 들지 않았다. 그들은 19세기와 같이 인지가 발달한 시대에 그와 같은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관리들은 베르나데트를 심문하고 위협했지만 그들이 바라는 대답을 듣지 못했다. 나중에는 한때 절도 혐의로 옥에 갇힌 일이 있는 그녀의 아버지까지 위협했으나 결과는 역시 마찬가지였다.
   모든 방법이 실패로 돌아가자 관리들은 동굴 앞에다 울타리를 치고 경찰관을 배치하여 아무도 접근 못하게 했다. 그렇게 하면 다시는 시끄러운 일이 없을 줄 알았다. 다시는 성모님이 발현했다는 얘기가 없는 줄 알았다.

그러나 복되신 어머니와 울타리는 아무 관계도 있을 수 없었다. 성모님은 여전히 같은 곳에 발현하셨다. 베르나데트는 동굴 앞에 있는 개울 건너편에 무릎을 꿇었다. "나의 눈엔 개울도 울타리도 보이지 않았다. 성모님과 나 사이의 거리도 보통 날과 다름이 없었다. 나는 성모님 이외엔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 그리고 그 날 따라 성모님은 훨씬 아름답게 보였다."
    성모 마리아는 미소를 지은 후 베르나데트에게 부드러운 이별을 고했다. 그 날은 마지막 발현의 날이었다.
   그러나 루르드의 이야기는 그 날로써 그친 것이 아니었다. 마지막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루르드의 성모'께 대한 사람들의 신심은 지극하였다. 울타리를 넘다가 붙잡혀 벌금을 물고서도 또다시 울타리를 넘곤 했다. 사람들은 마침내 루르드에서 얼마 안 되는 비아리츠라는 곳에서 휴양하고 있던 당시의 황제 나폴레옹 3세에게 탄원했다. 종교적인 사람들과 반종교적인 사람들 사이를 교묘하게 조정할 줄 아는 황제는 그들의 탄원을 받아들여 울타리를 철거했다. 순례자들이 몰려들었다.
   루르드가 속해 있던 타브르의 주교는 조사단을 임명하여 베르나데트의 이야기를 철저히 조사하게 했다. 목격자들을 여러 차례 심문하고 베르나데트의 이야기를 수십 번 청취하여 작성한 보고서를 검토한 주교는 루르드의 신심을 인정했다.
   곧 이어 큰 성당들이 세워지고 병든 순례자들을 위한 병원이 세워졌다. 오늘날 루르드의 대성당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성당의 하나이며 해마다 150만 명의 순례자가 이곳을 찾아든다. 이들 순례자들의 신심은 고무적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열렬히 기도하는 루르드의 하늘은 온통 기도로 가득 찬 듯한 감을 준다.

베르나데트는 후에 수녀가 되었다. 성모님이 경고한 바와같이 그녀는 현세에서는 행복을 맛보지 못했다. 살아 있는 '성인'을 보려고 몰려드는 사람들의 호기심, 베르나데트는 겸손하지 못하다고 오해한 원장 수녀의 엄격함, 그리고 육신을 갉아먹는 폐결핵 등 갖은 고통이 그녀를 괴롭혔다. 루르드에서 병을 고친 사람의 수효가 수백을 헤아렸지만 베르나데트는 그런 은혜도 입지 못했다.
   1879년 4월 16일 베르나데트는 '동굴의 성모'께 마지막 기도를 드리면서 세상을 떠났다.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거룩한 마리아여, 불쌍한 죄인, 저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그녀는 1933년 12월 8일 성녀품에 올림을 받았다.

 

바뇌의 성모


1. 발현 배경과 시기

유럽의 작은 나라 벨기에의 1월은 대단히 추운 계절이다. 천주교회가 정식 인정한 성모님의 발현지인 '바뇌' 또한 나자렛과 같은 매우 천하고 보잘 것 없는 조그만 마을일 뿐이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일이 생길 수 있는 가" 라고 한 것처럼 이렇듯 작고 천한 마을 바뇌에서 성모님은 1933년 1월 15일 가난하고 천한 마리아 백호에게
발현
하신 것이다.
보랭에서 성모님의 발현이 끝난지 12일 만 이었다. 또한 1월 12일은 루르드 성모 발현 75주년 기념일로 많은 순례단이 루르드를 향하여 설레는 발걸음을 옮기고 있던 거룩한 시기에 발현 하신 것이다.


2. 나자렛 마리아와 마리아 벡호

성모님은 이 세상에 오실 때마다 당신을 가장 많이 닮은 이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중대한 임무를 맡기신다. 마리아 벡호는 매우 가난한 집의 11남매 중 맏이로써 저녁 7시 어두운 밤에 남동생을 기다리고 있었다.(벨기에는 4시에 어두워 지기 시작함)
또한 그는 거짓말 할 줄 모르는 매우 솔직하고 단순한 성격으로 정결한 마음의 소유자였다. 겸손하고 용기 또한 나자렛 마리아와 비슷한 성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성모님은 매우 솔직하고 정결한 마음을 지닌 마리아 벡호 에게 발현 하신 것이다.


3. 바뇌의 성모는 어떤 특징이 있는가?

무엇보다도 가장 큰 특징은 '가난한 자들의 동정녀' 라고 스스로를 소개하신 것처럼 병든자와 가난한자들의 고통을 덜어주러 오신 어머니다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바뇌의 성모님은 발현 하신 모습부터 매우 소박하고 겸손한 많은 자녀를 둔 어머니의 모습이다.
성모 마리아는 대단히 젊고 예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미소를 띄며 친절하게 벡호에게 나타나셨다. 그리스도의 사랑 있는 곳에 그리스도의 친절도 있다. 벡호 에게 발현하신 성모님은 어머니가 어린 아기를 바라보며 돌보듯 양손을 벌려 벡호를 바라보고 뒷걸음질 쳐가며 어머니답게 인격존중하며 샘물로 인도하셨다.

부랑아와 같은 매우 보잘 것 없는 아이를 존중하고 그에게 존경심을 드러내는 사랑많으신 어머니, 가난한 자의 동정녀이며 병든이들의 고통을 덜어주러 오신 바뇌의 성모님께 고통받는 많은 이들은 영원히 위안을 받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바뇌에 발현하신 마리아는 늘 기도하는 모습으로 발현하시고 벡호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셨다.
이로써 냉담중이던 마리아 벡호는 묵주를 찾아 기도를 드리고 성당에도 다시 나가 교리를 배우고 첫 영성체를 받았다. 마리아는 하느님과 멀어진 아이를 예수님께 인도하신 것이다.

1933년 이래 오늘에 이르기 까지 벨기에 바뇌의 소성당에는 성모님께서 마리아 벡호에게 말씀하신 '병든 이들을 위하여 보존되어 온 샘물'이 마르지 않고 솟아나 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완케되는 기적이 매일 매일 기적 처럼 일어나고 있다.


4. 바뇌의 성모 마리아의 가르침

바뇌에 발현하신 성모님은 무엇을 가르치시는가? 마리아는 늘 기도하는 사람으로 발현하셨다. 8번 발현하신 중에 5섯번을 기도에 대하여 말씀하시므로 기도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셨다.
또한 작은 성당을 원한다고 하심으로 성모님은 예수님을 중심해서 말씀하심을 알 수 있다.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아이에게 부드럽고 친절하게 가르치고 그의 인격을 존중함으로 누구든지 하느님 앞에 가난한 이들을 업신 여기지 않도록 하셨다.

마리아벡호는 가난한 집의 11남매 중 맏이이며 지금도 수도자나 동정녀가 아닌 많은 자녀를 둔 어머니이다. 그는 여러가지 고통 중에도 순례객 들을 위하여 자원봉사자로 일하고 있다.
바뇌의 성모님은 마리아 벡호를 통하여 현대를 살아가는 어머니가 어떠해야 하는 가를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국내에서는 마리아수녀회가 바뇌의 성모를 주보성인으로 모시고 있으며, 바뇌의 성모님을 본받아 마리아수녀회 사도직의 목적은 가난한 이들의 현실적인 의식주 뿐 아니라 그들의 영원한 생명, 영원한 행복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그들을 인도하는 것으로 하고 있다.

◎ 교황 승인 - 현지 대성당 관계자

10월13일 교황 주례 희망

 

1917년 포르투갈의 파티마에서 성모발현을 목격한 목동 3명 중 2명이 곧 복자품에 오른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당시 성모 발현을 목격한 히야친타 마르토(Jacinta Marto, 1910∼1920)와 프란치스코 마르토(Francisco Marto, 1908∼1919)에 대한 시복을 승인하고 이를 지난달 28일 공식 발표했다.

 

시복식 장소와 날짜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지만 파티마 대성당의 관계자들은 오는 10월13일(파티마 성모 마지막 발현 기념일) 교황이 직접 현지를 방문해 시복식을 주례해 주길 기대하고 있다.

 

 

양치기였던 세 어린이들은 1917년 5월13일부터 10월13일까지 매 13일 6회에 걸쳐 발현한 성모를 직접 보고 그 메시지를 들었다. 당시 성모 발현이 거듭되자 파티마에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으며, 성모가 자신의 정체를 밝히겠다고 약속한 10월13일에는 태양이 수직으로 떨어지며 10여분간 갖가지 빛을 발하는 ‘태양의 기적’을 7만명의 군중이 목격했다.

 

파티마 성모는 세 어린이들을 통해 ▲ 속죄하고 묵주의 기도를 자주 바칠 것 ▲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기도와 고행을 바칠 것 등을 당부했다. 성모는 이같은 회개와 희생은 많은 영혼을 구하는 것은 물론 러시아의 회개와 세계평화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약속했다.

 

남매인 히야친타와 프란치스코는 그후 감기가 악성폐렴으로 악화돼 세상을 떠났는데 이들의 죽음은 성모 발현시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가 달라”고 요청한 데 대한 응답으로 여겨지고 있다. 나머지 한 명은 현재 가르멜회 수녀로 있는 루치아로 그녀는 파티마 성모 발현에 관한 3권의 책을 저술했다.

 

포르투갈 주교단은 1930년에 파티마의 성모발현을 공식적으로 인정했으며, 교황청의 시복절차는 1979년부터 시작되었다. 파티마 성모가 남긴 메시지 보급과 실천을 위해 설립된 대표적인 단체가 국내에서도 활동하고 있는 ‘마리아의 푸른군대’다.

 

 

 

성모 발현과 그 메시지들

 

“하느님 뜻 전하는 어머니따라 끊임없이 기도하고 회개해야”

 
교회 역사 안에서 성모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모친이요, 교회의 어머니로서 당신 아들의 이름으로 하느님 뜻을 알리는 초자연적인 현현(顯現) 현상을 여러 차례 보여왔다.

성모 마리아와 관련된 축일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축일로 꼽히는 성모 승천 대축일을 맞아 교회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성모 발현과 그 메시지들을 소개한다.

그간 교회의 정식 인가를 받은 성모 발현은 1858년 2월 11일~ 7월 16일 프랑스 루르드에서 보인 18차례의 발현을 비롯 멕시코 과달루페, 프랑스 라 살레트, 아일랜드 노크, 포르투갈 파티마, 벨기에 보랭과 바뇌 등 총 일곱 차례로 꼽힌다.

이 같은 발현을 통해 드러난 성모 마리아의 주된 메시지는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 그리고 어려울 때 자신을 찾아 의탁할 것을 간청하는 모습이었다.

■ 과달루페(Guadalupe)

"나는 평생 동정이며, 하느님의 어머니임이 알려지기를 원하고 어려울 때에 정성을 다해 나를 찾는 이들에게 나의 자비를 드러내도록 이 자리에 성당을 짓기를 바란다."

1531년 12월 9일 멕시코 원주민 후안 디에고(Juan Diego)에게 성모 마리아는 4차례에 걸쳐 나타나 이 같은 메시지를 남겼다. 원주민들이 신전을 세웠던 테페약언덕에서 성모 마리아는 인디언 피부의 용모를 보였다.

당시 멕시코는 스페인에 의해 정복된 지 10년 되는 해를 맞고 있었고 원주민들이 폭압과 폭정에 시달리고 있던 상황. 이 성모 발현은 이후 8년 만에 당시 800만 인구 중 700만 명이 영세, 입교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 파리(Paris)

성모는 1830년 11월 27일 파리의 뤼 뒤 박 소재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 지원자였던 카타리나에게 나타나 지구 위에 서서 두 팔을 지구 위로 활짝 펼친 형상을 드러냈다. 그 주변에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여, 당신께 의탁하는 우리를 위하여 빌으소서'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때 자신이 나타난 모습대로 메달을 만들어 지니는 사람은 큰 은총을 받을 것이라 했는데, 그 후 메달 착용이 늘어나면서 수많은 기적이 일어나 '기적의 메달'이라고 불리게 됐다.

이 발현은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에 대한 신심을 고조시켰고 교황 비오 9세는 1854년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없으신 잉태'를 믿을 교리로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 프랑스 파리의 기적의 메달성당.
지구 위에 서 있었던 발현 당시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재현했다.
 
 
■ 라 살레트(La Salette)

성모 마리아가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죄인들의 화해자'라고 밝힌 발현이다. 과학만능주의, 자유주의, 무신론의 풍조 속에 전통적 신앙과 성서 가르침이 위기를 맞던 19세기 후반, 1846년 9월 19일 프랑스 가르가스산 기슭의 라 살레트에서 11세의 막시망 지로와 15세의 멜라니 마티유 칼바에게 나타난 성모는 인류가 회개하여 하느님과 화해하면 축복을 받지만 그렇지 않으면 큰 벌을 받으리라고 경고했다.

발현 당시 사람들은 이 메시지를 무시했으나 보불 전쟁과 대흉년으로 100만 명 이상이 굶어죽는 재앙이 닥쳐오자 회개하는 순례객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 루르드(Lourdes)

성모는 1858년 2월11일부터 7월 16일까지 18회에 걸쳐 루르드 동굴에서 14세 소녀 베르나 데트에게 발현했다.

이때는 교황 비오 9세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없으신 잉태' 교리를 반포한 지 4년째 되는 해였고 자유주의 사상의 팽배로 지식층들이 교회 가르침을 의심하고 교회를 떠나는 경향이 늘어나던 시기였다.

'원죄없는 잉태된 자'로 본인을 소개했던 성모는 기도와 보속 행위, 회개를 촉구했으며 많은 묵주기도를 권했다. 이후 루르드에는 매년 수백만 명의 순례자가 방문하고 있으며 수많은 기적이 보고되었다.

■ 퐁멩(Pontmain)

1871년 1월 17일 프랑스 부르타뉴와 노르망디 접경 지역 라발 교구 작은 마을 퐁멩에 12세 외젠느와 11세 요셉 바르베데트에게 성모가 자신을 드러냈다. 그리스도가 못 박힌 붉은 십자가를 양손에 잡은 모습이었고 검은 면사포에 허리띠 없는 짙은 하늘색 바탕에 별들이 그려진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이때 성모 마리아는 '얘들아 언제나 기도하여라. 내 아들은 너희의 기도를 들어 허락하신다'는 글씨를 아이들에게 보여주었다.

러시아 군대가 프랑스 전역을 침략, 위태로운 상황을 맞던 처지에서 발현 후 10여일 만인 1월 28일 휴전 협정이 조인되자 많은 이들이 발현한 성모를 '희망의 여인'으로 부르며 순례를 했다고 한다.
 

 
▲ 프랑스 퐁멩.
1871년에 발현한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되살렸다.
 
 
 
■ 노크(Knock)

19세기 후반 아일랜드는 영국의 억압과 대기근으로 큰 고통을 겪고 있었다.

1879년 8월 21일 아일랜드 노크에서 마을 주민 15명에게 나타난 성모는 흰옷을 입고 기도하는 모습으로 성 요셉과 사도 요한과 함께였다.

제대와 어린양 주위로 천사들이 돌고 있는 모양의 발현이었다. 특별하게 말씀으로 전한 메시지는 없었으나 미사의 중요성을 특히 강조한 것으로 알려진다.

■ 파티마(Fatima)

1917년 5월 13일부터 10월 13일까지 6차례에 걸쳐 포르투갈 레이리아 교구 작은 마을 파티마에서 10세의 루치아, 7세의 히야친타, 9세의 프란치스코에게 발현했다.

'로사리오의 여왕'이라고 자신을 밝힌 성모는 세계 평화를 위해 매일 묵주 기도를 바칠 것과 죄인을 위해 희생할 것, 그리고 성모성심을 공경할 것을 요청하였고 특히 러시아를 당신 성심에게 봉헌하고 매월 첫 토요일 영성체 할 것을 당부했다. 또 끊임없는 기도와 희생 보속을 통해서만 세계 평화와 러시아의 회개 및 교회의 안정 평온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예언했다.
 

 
▲ 성모 마리아의 발현을 기려 포르투갈 파티마에 세워진 파티마성당.
 
 
 
■ 보랭(Beauraing)

1932년 11월 29일부터 1933년 1월 3일 사이, 벨기에 남부 지역 보랭에서 9~15세 다섯 아이들에게 33회에 걸쳐 나타났다. 흰옷에 황금관을 쓰고 양손을 들어 티없는 황금빛 성심을 드러내 보인 성모는 자신을 '원죄없이 잉태된 티없는 동정녀, 하느님의 어머니요 천상 여왕' 으로 전하고 끊임없는 희생과 기도 및 죄인들의 회개를 청했다. 이후, 공산주의 영향으로 교회를 떠났던 많은 신자들이 회개하고 돌아왔다. 발현 첫해의 순례자가 200만 명이 넘을 정도였다. 병의 치유와 영적 치유(회개)도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 바뇌(Banneux)

1933년 벨기에 바뇌에서 비신자였던 12세 소녀 마리에트에게 발현, '가난한 자의 동정녀'라고 자신을 칭했다. 루르드 발현 때처럼 흰 옷에 푸른 허리 띠를 두르고 고개를 약간 왼쪽으로 숙인채 합장하고 오른팔에 묵주를 늘어뜨린 모습이었다. 이때 성모는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위로하러 왔다고 밝히고 기도를 많이 바칠 것을 요청했다. 그후 수많은 성당이 바뇌의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