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 무관 출신인 마천목(馬天牧·1358∼1431)은 1381년(우왕 7년) 처음 벼슬길에 나서 여러 차례 승진을 거쳐 조선 태조 초기 대장군(大將軍)에 오른 인물입니다. 그는 1381년(태조 7년)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인 정안군 방원을 도와 공훈을 세웠답니다. 정안군은 나중에 조선 제3대 임금(태종)으로 등극했으니 실세 권력의 줄을 잘 선 셈이지요.
1399년(정종 1년)에 상장군(上將軍)이 된 그는 이듬해 태조의 넷째 아들인 회안군 방간이 박포와 결탁해 방원을 몰아내기 위해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자 다시 정안군의 선봉이 되어 방간 일당을 제거하는 데 앞장섰답니다. 정안군은 마천목의 도움으로 왕자의 난이 모두 평정된 1401년 정종의 양위(讓位·왕의 자리를 물려줌)에 따라 임금으로 즉위했지요.
예나 지금이나 권력을 잡으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공신 등급을 매기는 것이듯 태종은 집권 직후 공을 세운 47명을 4등급으로 나눠 교서(敎書·국왕 발표 문서)와 함께 녹권(錄券·공신에게 지급하는 문서)을 내렸답니다. 마천목에게는 좌명공신(佐命功臣) 3등이 부여됐는데, 좌명이란 천명을 보좌한다는 뜻으로 임금을 세우는 막중한 임무를 말하지요.
마천목의 녹권에는 논밭 80결(1결은 약 3000평), 노비 8가구, 은품대(銀品帶) 1세트, 옷감 1감, 말 1필을 하사하고 회령군(會寧君)에 책봉한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습니다. 당시 태종이 내린 좌명공신 녹권 가운데 지금까지 유일하게 남아 있는 이 녹권은 장흥(長興)마씨 중앙종회가 국립고궁박물관에 기탁한 것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06년 보물 제1469호로 지정됐답니다.
조선 초기 북방 6진(鎭) 설치를 처음 주장한 마천목은 1421년(세종 3년) 명나라로 건너가 조선 국호를 승인받는 데 공을 세워 태상왕(태종)이 낙천정(樂天亭·지금의 서울 자양동에 있던 연회용 정자)에서 치하연을 베풀 정도로 권세를 누렸습니다. 앞서 1409년 감순청 재직 중 치사사건으로 벌을 받게 됐으나 태종의 배려로 고향인 전남 곡성 유배에 그치기도 했답니다.
고려와 조선 두 왕조에 걸쳐 벼슬을 하고 조선 4대 임금을 모신 그는 1424년 홀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곡성으로 하향했으며, 얼마 후 모친상을 치르고 1428년 장흥군(長興君)으로 복직됐습니다. 이듬해 장흥부원군(長興府院俯君)에 올랐으나 1431년 7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지요. 그가 죽자 세종은 3일 동안 조회를 중단하고 예를 갖추었으며, 영의정으로 추증했답니다.
마천목 좌명공신 녹권이 18일부터 4월 10일까지 국립고궁박물관 제왕기록실에서 전시됩니다. 공신 호칭의 부여와 등급별 포상 내용, 특전, 공신도감의 조직 및 운영관계 등이 적혀 있어 조선 공신녹권의 실상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랍니다. 보물 지정 후 처음 공개되는 문화재로 태종의 신임을 듬뿍 받은 ‘왕의 남자’ 기록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마씨 종친회 카페 http://www.jhma.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