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초상화

주문/마천목 좌명공신녹권

klgallery 2012. 3. 13. 13:45

 

                                                                                         (사이즈 80호 140*110  실크 유화)

 

마천목 좌명공신녹권(馬天牧 佐命功臣錄券)

o 문화재명 : 마천목 좌명공신녹권(馬天牧 佐命功臣錄券)
o 수량 : 1축
o 연대 : 조선태종1년(1401)
o 규격(cm) : 세로 39cm, 가로 570cm
o 소재지 : 전라남도 곡성군 석곡면 방송리 291
o 소유자(관리자) : 장흥마씨중앙종회
o 지정예고일자 : 2006.2.24

이 녹권은 조선 태종 1년(1401) 공신도감에서 절충장군 웅무시위사상장군(折衝將軍 雄武侍衛司上將軍) 마천목(馬天牧)에게 발급한 좌명공신녹권(佐命功臣錄券)으로 필사본이다.
좌명공신은 조선초기 제2차 왕자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운 사람에게 내린 공신호이다. 마천목은 1400년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후에 태종이 되는 정안군을 도와 난을 평정하는데 앞장섰다. 태종은 태조가 즉위한 직후 태조개국공신(太祖開國功臣)을 책봉한 예를 좇아, 자신을 도운 47명의 공신을 선정하여 좌명공신(佐命功臣)으로 칭하하고 4등급으로 나누어 포상(褒賞)하였다. 이 때 마천목은 3등 공신으로 녹권을 사급받았다.
마천목 좌명공신녹권은 좌명공신 47명에게 발급된 것 중의 하나로 현재까지는 유일본이다. 조선초기에 사급된 개국공신녹권 및 개국원종공신녹권과 비교해 볼 때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 출납(出納)에서 의정부(議政府)의 관(關)으로 바뀐 것 이외에는 서식(書式)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공식녹권의 체제나 양식변화를 알 수 있는 자료이다. 또한 공신호의 부여와 등급별 포상내용, 특전 등은 공신관계 연구자료로서, 공신도감 구성원은 공신도감의 조직 및 운영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공신도감연구 자료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조선초기에 지정된 녹권들이 대부분 원종공신녹권이며 이화개국공신녹권(국보 232호)만이 정공신 녹권이란 점을 상기하면 마천목 좌명공신 녹권은 역사적으로나 학술적으로 대단히 가치가 있다고 하겠다.

 

마천목 장군 사당

  • 구 분 : 기타
  • 연 락 처 : 061 - 360 - 8349
  • 소 재 지 : 곡성군 석곡면 방주길 135-2

마천목 장군의 본관은 장흥으로 호는 오천이며 장흥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곡성으로 옮겨와 살았다. 원래 신체가 강건하고 힘과 무예가 출중하였을 뿐만 아니라 경서에도 능통하였다고 한다.
마천목장군이 어릴 적 어머니가 병을 얻어 물고기를 원하자 섬진강변에 나갔다가 이상하게 푸른 돌을 주워왔는데 도깨비들이 몰려와 두목 도깨비를 돌려주면 무엇이든지 다 하겠다고 했다.
마천목은 강에다 어살을 만들어놓으면 돌려주겠다고 하자 어살을 만들어 놓았다는 도깨비살 전설이 전한다.이곳은 곡성읍에서 구례방면 17번 국도를 타고 오곡면 소재지와 삼원 콘크리트를 지나 섬진강변을 타고 3분정도 달리면 도로 오른편에 있는 송정마을에서 중간 정도 내려가다보면 고달면 두계 앞에 있는 어살이다.
장군이 23세가 되던 해 고려 우왕 7년에 공직에 발을 들여 놓았으며, 37세에는 정 7품인 사직의 자리에서 봉직하였다. 이 때는 고려가 망하고 이성계가 조선조를 세우고 태조가 된지 7년밖에 되지 않아 아직 왕권이 확립되지 못하던 시기다. 왕자들끼리 왕권쟁탈을 위하여 피를 흘릴 때였다.
마천목 장군은 「제 1차 왕자의 난」에 방원을 도와 공훈을 세워 상장군의 직위를 받았다. 또한 「제 2차 왕자의 난」때는 방간의 편에 섰던 박포를 사로잡아 평정한 공으로 좌명공신 3등에 녹훈되었다. 게다가 회령군에 책봉되면서 동지총제로 승진하였고, 태종 12년에 나주목사에 임명되면서 장흥군으로 개봉되었으며 태종 17년에 전라도 병마도절제사가 되었다.
이 때 전라병영은 광주에 있었는데 공이 왜구에 대한 방비를 위해 병영을 강진지역으로 옮길 것을 청하여 병영의 터를 세웠다.
세종 11년에 장흥부원군에 진봉되었고 세종 13년에 74세로 생을 마쳤다. 충정의 시호를 받았으며 성품이 광심하고 순근하며 무략에 있어 시위와 국방에 큰 공헌을 하였다. 마천목 장군에 얽힌 전설이 오곡면에 있다

 


고려 말 무관 출신인 마천목(馬天牧·1358∼1431)은 1381년(우왕 7년) 처음 벼슬길에 나서 여러 차례 승진을 거쳐 조선 태조 초기 대장군(大將軍)에 오른 인물입니다. 그는 1381년(태조 7년)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인 정안군 방원을 도와 공훈을 세웠답니다. 정안군은 나중에 조선 제3대 임금(태종)으로 등극했으니 실세 권력의 줄을 잘 선 셈이지요.

1399년(정종 1년)에 상장군(上將軍)이 된 그는 이듬해 태조의 넷째 아들인 회안군 방간이 박포와 결탁해 방원을 몰아내기 위해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자 다시 정안군의 선봉이 되어 방간 일당을 제거하는 데 앞장섰답니다. 정안군은 마천목의 도움으로 왕자의 난이 모두 평정된 1401년 정종의 양위(讓位·왕의 자리를 물려줌)에 따라 임금으로 즉위했지요.

예나 지금이나 권력을 잡으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공신 등급을 매기는 것이듯 태종은 집권 직후 공을 세운 47명을 4등급으로 나눠 교서(敎書·국왕 발표 문서)와 함께 녹권(錄券·공신에게 지급하는 문서)을 내렸답니다. 마천목에게는 좌명공신(佐命功臣) 3등이 부여됐는데, 좌명이란 천명을 보좌한다는 뜻으로 임금을 세우는 막중한 임무를 말하지요.

마천목의 녹권에는 논밭 80결(1결은 약 3000평), 노비 8가구, 은품대(銀品帶) 1세트, 옷감 1감, 말 1필을 하사하고 회령군(會寧君)에 책봉한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습니다. 당시 태종이 내린 좌명공신 녹권 가운데 지금까지 유일하게 남아 있는 이 녹권은 장흥(長興)마씨 중앙종회국립고궁박물관에 기탁한 것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06년 보물 제1469호로 지정됐답니다.

조선 초기 북방 6진(鎭) 설치를 처음 주장한 마천목은 1421년(세종 3년) 명나라로 건너가 조선 국호를 승인받는 데 공을 세워 태상왕(태종)이 낙천정(樂天亭·지금의 서울 자양동에 있던 연회용 정자)에서 치하연을 베풀 정도로 권세를 누렸습니다. 앞서 1409년 감순청 재직 중 치사사건으로 벌을 받게 됐으나 태종의 배려로 고향인 전남 곡성 유배에 그치기도 했답니다.

고려와 조선 두 왕조에 걸쳐 벼슬을 하고 조선 4대 임금을 모신 그는 1424년 홀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곡성으로 하향했으며, 얼마 후 모친상을 치르고 1428년 장흥군(長興君)으로 복직됐습니다. 이듬해 장흥부원군(長興府院俯君)에 올랐으나 1431년 7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지요. 그가 죽자 세종은 3일 동안 조회를 중단하고 예를 갖추었으며, 영의정으로 추증했답니다.

마천목 좌명공신 녹권이 18일부터 4월 10일까지 국립고궁박물관 제왕기록실에서 전시됩니다. 공신 호칭의 부여와 등급별 포상 내용, 특전, 공신도감의 조직 및 운영관계 등이 적혀 있어 조선 공신녹권의 실상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랍니다. 보물 지정 후 처음 공개되는 문화재로 태종의 신임을 듬뿍 받은 ‘왕의 남자’ 기록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마씨 종친회 카페  http://www.jhma.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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