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바이올리니스트가 아니라,
우리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요즘 젊은이들이 정경화의 존재를 어떻게 생각할까?
흠~ 아마도 요즘의 김연아쯤으로 비교하면 어떨까 생각한다.
한국을 불모지에서 단번에 최고의 나라로 만든 기적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흠모할 뜨거운 열정
무엇보다... 불타는 젊음의 아름다움.
마치 잃어버렸던 사랑을 찾듯이
정경화에의 기억을 더듬어
가슴을 따스하게...
벅차게.
또!
세계 음악계를 주름잡던 정경화의 인상깊은 얼굴.
너무 오래 보지 못하고 지내서, 정말 보고 싶었는데...
참 오래간 만에 찾아와 지난 4일 연주회를 열었다.
완숙미를 느끼게 하는 이 인터뷰의 표정만으로도...
표가 미리 매진되어 엄두도 내지 못한 이 연주회의 아쉬움을
조금 위로하는 뜻에서 그동안의 사진모음으로 정경화를 만나보려고 한다.
(여러분들이 모아 놓은 자료를 짜깁기하였음을 미리 밝혀 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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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연주 모습을 먼저
(런던에서 데뷰하기 직전에 찍은 최고의 사진 - 저작권 @magnum)
연주 중에 이렇게 환히 웃는 화려하고도 순수한 얼굴의 바이올리니스트
한국인에게서 가장 아쉽다는 자기만의 표현력!
거장들도 당황할 정도의 분명한 해석.
누가 뭐래도 강한 자신만의 소리
그러면서도 따스함~
이제 만난다
으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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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로 세계적인 이름을 드높인 한국인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는 1948년 서울출생.
3살 때 피아노를 처음 배우기 시작했지만, 5살 쯤 바이올린을 만지작거리다 옮겼다.
(피아노가 아니라 바이올린을 위해 타고 났음이 저절로 드러났다고 모친이 전한다)
"(피아노를 치다가)
6세 때 바이올린으로 바꿨는데 그렇게 즐겁고 편안한 거얘요.
바이올린을 켜면서 방안을 이리저리 걸어다니면서
눈을 지긋이 감고 상상에 잠기던 기억이 나요.
(남산)초등학교 1학년 때 전체 조회 시간에
앞에 나가서 노래 몇곡을 연주했는데,
그게 배운지 꼭 일주일 만이었어요."
- 정경화의 '어린시절 추억담' 중에서.
이미 어린 시절부터 다른 형제들과 함께 가족 음악회를 통해 공연을 시작한 정경화는
9살 때 콩쿨에서 특상을 차지해 서울시립교향악단과 멘델스존 협주곡을 연주했다.
(나중에 이 멘델스죤 협주곡은 정경화의 대표적인 레퍼토리의 하나가 되었다.)
1959년, 큰 언니 정명소씨가 가장 먼저 유학을 떠났다.
공항에서 큰 언니를 배웅하며 찍은 이 사진, 두 자매가 몹시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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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되던 1961년 미국 줄리어드 음악학교에 전액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당대의 '명조련사'로 알려진 이반 갈라미안 밑에서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
"(당시 줄리어드에는) 한국사람이라곤 전혀 없었어요.
한동일씨가 조금 먼저 와 있었지만 만나볼 사이는 못되었어요.
그때는 어떤 면에서는 (갈라미안) 선생님한테 완전히 집중되고
사랑도 많이 받아 꿈같은 시절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갈라미언 선생님께도 동양인으로는 첫 제자였고,
한국이란 나라를 잘 모르던 시절이었어요.
(그리고) 또...
얼마나 애국심에 불타고 있었는지,
내가 꼭 성공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뿐이었어요.
성냥개비 하나라도 (무심히) 쓰려고 하면, 큰 언니가
"지금 한국이 어떤 땐데 낭비하냐"고 할 정도였지요.
한국인이 정말 대단한 민족이란 생각이 들어요.
모든 게 이렇게 발전했쟎아요?"
1967년에 레벤트리트 국제 음악 콩쿠르에서
동문 핑커스 주커만과 공동우승으로 세계무대에 처음 이름을 알렸다.
하지만 (김연아처럼 꾸준히 준비하여) 세계적인 이름을 얻는 기회를 잡았다.
바로 런던심포니(LSO)에서 이작 펄만의 펑크로 급히 대신 연주할 기회를 잡은 것이다.
1970년 앙드레 프레빈이 지휘한 런던교향악단과 차이코프스키 협주곡을 협연한
런던 데뷔 무대는 거의 센세이셔널한 반응의 대 성공을 거두었다.
앙드레 프레빈과 영국 청중들은 매니아가 될 수 밖에...
1970년, 데뷔 무대를 함께한 앙드레 프레빈 및 런던 교향악단과 함께
차이콥스키/시벨리우스 협주곡으로 첫 음반을 녹음했다.
전 세계가 비로소 정경화의 발 아래~
경매로 나왔던 1970년 데뷰당시의 친필 싸인이 있는 초기 브로마이드
1970년 무렵에는 명 바이올리니스트인 요제프 시게티의 지도를 받아
문학과 예술 전반에 대한 더욱 깊은 이해를 얻었다.
작곡가 왈튼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마치고 작곡가와 함께.
왈튼은 1972년 런던에서 정경화의 연주를 듣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내 곡은 더 이상 다른 사람이 연주할 필요가 없다"고 격찬했다.
바쁜 중에도 한국 무대를 소홀히 한적이 없는 정경화의 1973년 연주회 포스터
1974년 서울 시립교향악단(지휘 샤를르 뒤뜨와)과의 차곱스키 협주곡 등
피아니스트 라두루푸와 함께한 덴마크 연주회. 1976년
1982년 브뤼셀에서 - 나중에 퀸 엘리자베스 콩쿨에 최연소 심사워원으로 참여했다.
콩쿨 심사 내내 자신의 리벤트리트 콩쿨때의 가슴 졸였던 감정이 되살아나,
(세계적 경쟁 속에 혼자 던져졌던 정경화에 대한 연민~)
다시는 콩쿨 심사는 맡지 않았다고 한다.
음반 활동도 활발히 한 정경화.
1979년 런던 바흐 트리오 소나타녹음실에서
왼쪽으로부터, 모레이 웰시, 필립 몰, 정경화, 제임스 골웨이
정경화는 이후에 영국의 런던을 중심으로 자신의 활동 무대를 옮겼다.
이때부터 결혼한 1984년까지 한해 100회가 넘는 연주회를 소화하며 정력적인 활동을 펼쳤다.
사람들에게 익숙한 위 바이올린 소품집 제목은 남편 리케트씨가 선택했다고 한다.
1984년 영국인 사업가 제프리 리케트와 결혼하여 두 아들을 두었다.
두 아들의 우리나라 이름이 재곤이와 유진이다.
남편 리케트와의 결혼 후 서명하는 장면.
1988년 10.12. 둘째 아들 유진이의 첫돌 - 이젠 20대의 어엿한 청년이 되었다.
옆 할아버지는 1970년 이후 줄곧 정경화 음반의 프로듀서를 맡고 있는 크리스토퍼 레이번
1992년 정트리오 연주회 리허설을 마치고.
재곤/유진이와 함께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두 아이의 엄마로 포즈를 취한 정경화
"엄마가 50년을 해봤지만 이 세상에 음악처럼 좋은 게 없다.
엄마가 한 때는 연습하는 것도 싫어하고 그랬지만,
이 세상에서 나처럼 행복한 사람이 없다.
다른사람한테 즐거움을 주기도하지만
(실은) 나 자신이 제일 행복하다.
그렇기 때문에 너희들 한테 권할 수 있는데...
하지만 제일 중요한게 노력이기 때문에
너희들이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 그런 말을 해주죠.
큰 애는 자기가 좋아서 하는데,
유진이는 연습하기가 죽을만큼 싫대요.
하지만 엄마를 사랑하기 때문에 한대요.(웃음)
그래서 "어, 그래? 난 너무너무 행복한 사람이구나.
하지만 엄말 아무리 사랑해도 그러면 안돼.
엄마는 네가 행복하면 됐지.
엄마행복하게 해주려고
그러지 않아도 돼."
했죠.
(정경화)
정경화는... 음반을 남기는데도 게을리하지 않아 수많은 명판과 뒤이은 수상,
동양인 클래식 음악가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떨친 아마도 거의 최초의 인물인 그녀는,
언니 첼리스트 정명화, 동생 피아니스트 정명훈과 함께 국제적 주목을 받았다.
국내외에서 바쁜 독주회 중에도 정트리오로 무대에 서기도 했는데...
어머니 이상화 여사를 위한 정트리오의 연주 후... 기립박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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