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스크랩] 카라얀...이제는 전설이 되어버린 거장

klgallery 2008. 11. 25. 12:32
Herbert von Karajan Herbert von Karajan. "그로테스크한 용모와 귀족적인 지휘자세로 많은 미술가들에게 영감을 불어 넣어주어 아직도 전세계의 많은 액자속에 남아 벽을 장식하고 있는 인물" "그와 협연을 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콧대높은 독주가들조차 몇일씩 잠자리를 설치게 만들었던 명지휘자" "늙고 불편한 몸에도 동방의 작은 나라로 날아와 받침대에 몸을 기댄체 끝까지 악단을 지휘하던 고집쟁이 노인" "멋진 외모를 가진 노신사, 이제는 전설이 되어버린 거장"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Herbert von Karajan (1908 - 1989) 카라얀의 생애 카라얀은 1908년 4월 5일 일요일에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났다. 바로 모차르트 이후 잘츠부르크에서 또 한명의 음악의 위인이 탄생한 날인 것이다. 카라얀의 조상은 그리스 출신이었지만 오스트리아에 정착하여 귀족의 칭호까지 얻게되어서 카라얀 가의 성에는 귀족 앞에만 붙은 von이 보태진다. 유년 시절 카라얀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은 바로 그의 형이었다. 카라얀은 유난히 작은 몸집이었기에 큰 덩치의 형에게 항상 열등감을 가졌으며 음악을 시작한 계기도 형에게 피아노를 뒤지지 않겠다는 단순한 경쟁의식에서 시작된다. 그가 스스로 인터뷰에서 터 놓은대로 그는 어릴 적부터 친구를 사귀기 힘들어하는 성격이었으며 누구에게도 자기의 본심을 털어놓을 수 없었다. 그런 그의 고독감은 바로 음악이라는 도피처에 미치도록 몰입하게 만든다. 14세때는 여름방학동안 영국으로 가서 3개월간 머물며 영어를 막힘없이 할 수있을 정도의 수준이 되었고 음악교육과 학교공부를 병행하는 생활은 계속되었다. 카라얀은 나찌의 덕택으로 출세를 손에 넣었지만 결국 1945년 5월 독일이 패망하자 결국 나찌의 희생물이 된다. 카라얀 부부는 종전시에 이탈리아의 밀라노에서 감금된 상태로 지내게 된다. 아내 아니타가 통역일로 생계를 꾸려나가고 카라얀 자신은 스코어 (오케스트라 총보)를 공부하는 것에만 전념한다. 카라얀은 대지휘자로 변신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1938년 7월에 카라얀은 아헨에 와서 알게된 미모의 오페레타 가수 엘미 호르가레프와 첫번째로 결혼한다. 그녀는 카라얀보다 11년 연상이었고 4년후 카라얀이 두번째 결혼한 후에도 재혼하지 않는다 1958년 카라얀은 모델 출신 금발의 프랑스 여성 엘리에트 무레와 세번째로 결혼한다. 무레는 카라얀에게 두 딸을 낳아주고 마지막까지 그의 아내로 남는다. 구시대 지휘자가 그러하듯 카라얀은 오케스트라의 자율적인 결의를 존중하지 않았으며 교사가 학생을 대하듯 굴욕감을 주기도 했다한다. 결국 1982년 12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베를린 필과 카라얀의 28년의 관계를 파탄으로 이끄는 사건이 벌어진다. 지금도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는 당시 23세의 여류 클라리넷 주자 자비네 마이어를 카라얀이 추천했으나 베를린 필의 단원들은 이를 거부한 것이다. 더이상 카라얀에게 단원들은 동지요 협력자가 아니었으며 카라얀은 그들에게 위협적인 태도로 돌변하게 된다. 카라얀이 베를린 필과의 일체의 활동을 중지하겠다고 선언해버린 것이다. 결국 사태는 마이어의 채용을 1년 동안의 기간에 한해 인정한다는 것으로 일단락 되었지만 카라얀과 베를린 필간에는 돌이킬 수 없는 감정의 골이 생겨버렸다. 결국 만년의 카라얀은 베를린 필 보다는 빈 필과 더 많은 활동을 갖게 된다. DG에서의 만년의 녹음들은 대부분 빈 필과 행해졌으며 1985년 6월 29일에는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에서 행해진 교황 요한 바우로 2세가 집전한 미사에서 빈 필과 모차르트의 대관식 미사를 연주하게 되고, 그가 스스로의 영상물을 위해 창설한 텔레몬드리알에 의해 녹화됨은 물론 전세계 TV로 중계되기도 했다. 1987년 1월 1일엔 빈 필의 신년음악회를 지휘하기도 했으며 그의 나이 80이 되는 1988년에는 그의 아내가 음반 표지를 그린 100장의 기념음반이 DG에서 기획되기도 했다. 그해 4월엔 예정된 연주회를 최소하고 베를린 필과 함께 일본, 같은 해 10월엔 마지막 유럽 순회 공연을 떠난다. 1989년 2월에 빈 필과 함께한 미국 공연은 그의 마지막 공식 연주가 된다. 그해 7월 16일 잘츠부르크에서 베르디의 오페라 "가면 무도회"의 오전 리허설을 끝낸 카라얀은 자신의 별장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다. 카라얀의 음악 카라얀을 비판하는 말중에 그가 지나치게 대중의 기호에 편승했다는 지적이 있다. 일단 이 말이 맞으려면 지휘자의 기호가 대중의 기호와 흡사하다 라고 고쳐져야할 것이며 무엇보다 대중의 기호는 수준 낮은 것이라는 '잘못된 전제'에서 시작하고 있다. 필자 판단에는 카라얀에 어떤 비판이 가능하다면 거꾸로 카라얀이 확실히 대중의 기호에 편승하지 못하고 후기 낭만주의의 구습을 답습했던 그의 실패작들 때문일 것이다. 카라얀의 위대함은 그가 자신있어했던 곡들은 예외없이 곡의 핵심을 짚어주고 있다는 데 있다. 이는 카라얀 스스로가 탁월한 심미안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그 '높은 표준'에 맞추기 위해 스스로의 연주를 평가해가며 만족스러울 때까지 계속 다듬어 갔기 때문에 가능했다. 다만 그는 위대한 '장인'이었을지언정 훌륭한 '혁명가'는 아니었다. 그는 20세기 초중반의 후기 낭만파 스타일의 연주를 20세기 후반까지 그대로 계승했으며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로 새로운 해석을 창조해낸 경우는 바그너의 작품들을 제외하고는 극히 드물다. 모차르트나 그보다 더 이전의 작곡가의 곡들을 정격연주로 재해석해보려는 시도들은 카라얀 스타일에 대한 도전으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그의 해석은 60년대초 이후 죽기전까지 거의 변하지 않았는데 이 말은 그가 곡의 이상을 세워놓고 줄곳 오케스트라와 가수들을 더욱 갈고 다듬는데 노력했다는 뜻이다. 그가 죽고 없는 현재의 음악계를 돌아보면 여기저기에서 '혁명가' 는 찾아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작품의 이상을 향해 매진해가는 카라얀과 같은 높은 식견을 가진 '장인'이 부족하기에 그의 부재가 더욱 커보인다. 카라얀은 근본적으로 교향곡과 오페라 지휘자였다. 그가 협주곡 녹음에 인색했던 것은 협주곡의 성격상 독주자가 지휘자보다 더 부각되는 경우가 많은 데 이를 카라얀은 용납치 않았다. 카라얀은 또한 교향곡외의 관현악곡에 뛰어나기로 유명하다. 그가 지휘하는 춤곡, 오페라 서곡과 간주곡들은 비교대상을 찾기 어려울만치 세련되고 잘 다듬어진 것이라 후배 지휘자들이 음반을 내놓기가 버거울 정도다. 이러한 곡들에선 카라얀이 곡의 재미를 완벽하게 청자에게 전달해주는 탁월한 능력을 가졌음을 뚜렷히 확인해볼 수 있다. 그러나 카라얀 스스로는 오페라 지휘자로 추앙받기를 더 원할 것이다. 그것도 가수들의 역할이 지휘자 못지 않게 중요한 이탈리아 오페라들 보다 - 물론 카라얀이 지휘한 훌륭한 이탈리아 오페라는 매우 많다 - 바그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등의 독일 오페라 지휘자로 기억되길 원할 것이다. 이는 그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잘츠부르크 부활절 페스티발의 목표가 바로 바그너의 오페라들을 상연하는 것이었다는 점만 보아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카라얀의 바그너 오페라를 강한 개성 때문에 싫어하는 분들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분명 그가 지휘하는 "트리스탄과 이졸데", "라인의 황금", "발퀴레", "로엔그린",그리고 "파르지팔" 에는 카라얀의 연주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정갈함, 아름다움, 그리고 열정이 있다. 그의 바그너는 푸르트벵글러나 크나퍼츠부쉬등 선배 지휘자 들의 해석에서 완벽히 벗어나있어서 교향곡이나 이탈리아 오페라 작품들의 해석이 토스카니니등의 스타일을 일부 계승하고 있다는 것과는 구별되는 업적으로 그의 바그너 오페라 작품들만으로도 카라얀은 능히 그의 이름을 불멸로 남길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올리브나무 그늘 아래서
글쓴이 : 짝꿍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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