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초상화

[스크랩] 민중화가 신학철..

klgallery 2007. 5. 11. 10:16

 

 



한국근대사 캔버스에 유채 128×100cm 1982


초혼곡 캔버스에 유채 244×122cm 1994

 


한국근대사    390×130cm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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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

 



  그대의 초상(손) 캔버스에 유채 122×200cm 1997

 



왼쪽 가위 오브제 45.5×33.3cm_1974
오른쪽 부활 오브제 72.7cm 53cm 1979



 묵시 콜라주 60.6×80.3cm 1980


모내기 캔버스에 유채 162.2×112.1cm 1987

신학철 화백은..

 

 


신학철은 1943년 경북 김천에서 태어났다. 그곳의 성의상고를 나왔으며 1968년에 홍익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대학 시절, 홍대 미술대학의 전위적인 실험의 한복판에서 작업하였으며 1976년 'WHAT 전'을 비롯하여 다수의 실험적인 모색에 참여하였다.

본격적인 미술가의 길로 들어선 70년대에 신학철은 전위파 그룹인 A.G에 참여하여 '아방가르드전', '앙데팡당전' 등에서 사물의 해체와 재구성 작업에 몰두하였다. 억압적이고 위선적인 현실에 대하여 '미술 장르적'인 전위 작업을 하던 그는 우연히 한국 근대사 사진집을 보고 이를 포토몽타쥬로 재현한 '한국근대사' 연작을 통해 80년대의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간다.

이를 시인 황지우는 '모더니즘의 뒷문을 열고' 나왔다고 썼으며, 미술평론가 김윤수는 '우주에서 운석이 떨어진 듯한 충격'이었다고 썼다. 탱화적인 구성에 목판화 운동이 대세이던 1980년대의 민중미술 운동에서 그는 특유의 포토몽타쥬 작업을 줄기차게 시도하였고 그 결실로 1991년에 제1회 민족미술상을 수상하였다.

90년대는 개인 신학철에게 시련의 시기였다. 1987년에 그린 '모내기' 그림이 국가보안법에 저촉되어 구속된 이후 10년 가까이 지루한, 그러나 매우 의미있는 법정 논쟁이 지속되었다. 우리의 전통적인 가치와 정서로 외세의 물신주의를 몰아내는 착상의 이 그림은, '위에서 아래를 몰아내는' 화면 구성의 특징 때문에 '북이 남을 쓸어내는', 곧 북한이 남한을 끝장낸다는 식의 공안적 검열에 의하여 고초를 겪는다. 그림 속의 초가집이 김일성의 생가를 그린 것이라는 공안검찰의 놀라운 해석도 있었다.

이적표현물이 된 '모내기'는 대법원의 선고 유예 판결 이후 사면을 받는 방식으로 잠시 휴전 중이다. 법률적 차원에서 선고 유예는 일정 기간 그 형의 선고를 유예한다는 것으로 범죄의 혐의를 아예 지우는 것은 아니다. 또한 사면은 특정의 범죄인에 대하여 형의 집행을 면제하거나 유죄 선고의 효력을 상실시키는 조치이므로 이 역시 신학철이 '적을 이롭게 할 목적으로 어떤 표현물을 제작'했다는 점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 셈이다.

그의 '모내기' 그림은 현재 UN 인권위원회에 제소된 상태이며 UN 인권위는 법무부 측에 작품을 폐기하지 말라는 통보를 한 상태로 일단 멈춰 있는 상황이다.

출처 : 푸른숲 사랑꽃
글쓴이 : 宣法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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